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라 -김성수 [출판사:미스바]
개혁주의의 관점에서 본 창세기
개혁신학에는 'eschatology precedes soteriology'는 말이 있습니다. '종말이 구원을 앞선다.' 는 뜻입니다. 그 말은 종종 '종말이 창조를 앞선다.' 라고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 말의 의미를 잘 곱씹어 보십시오. 종말은 끝을 의미하고 창조는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끝이 시작을 앞선다는 말은 이 시간 속에서 사는 우리에게는 다소 이율배반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을 잠시 벗어나서 영원 속에서 그 뜻을 이해한다면 그 말이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아시고(Omniscience)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며(Omnipotence)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는 영원 속에서 어떤 것을 계획하셨다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나요? 잘 생각해 보세요. 어떤 것을 계획하는 즉시 그 일은 실현하실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영원 속에서 어떤 것을 계획한 즉시 그 일이 완성이 된다는 것이 불가능한 말인가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는 영원 속에서 창조를 계획하셨을 때는 이미 요한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목적하시고 계획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창세전인 영원 속에서 완성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종말이 창조를, 혹은 구원을 앞선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니님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아무런 계획과 목적도 없이 우발적이며 즉흥적으로 어떤 일을 하신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이 그려져 있었다면 창조는 그 목적지를 향한 첫 삽에 불과한 것입니다. 첫 창조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묵시부분을 이해할 때는 자꾸 시간을 벗어나 이해를 하는 버릇을 들여여 합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물질이 존재할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시간은 물질이 존재하는 방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 속에서의 일을 시간에 얽매여 이해를 하려다 보면 자주 단단한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니깐 여러분은 창세기를 공부하시면서 여러분이 요한계시록에서 배운 이 역사와 우주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진행이 되어져 가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모르고 창세기를 이해할 수 없으며 창세기를 모르고 요한계시록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이 어떻게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는지 여러분은 확실하게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의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요한계시록의 의의 흰옷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잘 읽다보면 창세기, Prology는 요한계시록, eschatology 를 힌트하고 있고 요한계시록, eschatology는 창세기,protology를 완성하고 있는 구조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