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하와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궁핍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 둘 사이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양심과 믿음이 각각 낸 열매입니다. 그러나 불안한 양심 자체로는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일이 절대 없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서있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8:9). 믿음의 삶이 시작되려면, 먼저 '나는 죄인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한 자라, 그러므로 마땅히 율법의 저주 아래 있어 사형선고를 받은 자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의로운 선고를 공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핑계 댈 것이 없으며, 내보일 공로가 없으며, 정당하게 형벌을 감해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나의 최선의 선행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옷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수치로 내 얼굴을 가릴 뿐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복음이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내 상한 양심에 적용될 때 하나님의 어린양이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을 성령님께서 믿게 하실 때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 때에 믿음이 떨리는 손을 뻗어 대속자를 부여잡습니다. 그 때에 그 범죄자가 용서받으며,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_저자의 '아벨의 믿음' 강해 중에서
어린아이라도 은혜 받으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견지하게 되고, 은혜 없이는 세상의 석학도 결코 감도 잡지 못하는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을 보기 원합니까? 여기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된 '믿음의 선진들'을 만나 보십시오 그 선진들은 자기들이 사는 시대의 인본주의와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악한 풍조'를 거스르며, 하나님의 자녀로 '순전한 믿음의 기치'를 펄럭이며, 하늘 본향을 향해 진군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은 세상에서 미움과 조롱과 박해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이 「믿음의 깊은 샘 히브리서 제 4권」은 바로 그 믿음의 선진들의 동일한 믿음의 원리와 능력을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능란하게 풀어 제시한 능력의 책입니다. 역자는 이 책을 내는 과정 속에서 어째서 이 강해서가 시대의 변화에도 관계없이 반포되고 읽혀져야 할 절대적 이유를 발견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이 '발견'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간절함을 주시어 이 책을 내는 열심의 동력이 되게 하셨습니다.
_역자의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