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이 주석책을 쓰지 않은 유일한 성경이 요한계시록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중세 교회가 요한계시록을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기독교인들을 우민화하는 데 사용했다는 사실에 종교개혁자들이 분노했으며, 그들 가운데 쯔빙글리나 루터 은요한계시록의 정경성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그러한 문제의 소지가 있는책에 대한 주석을 굳이 저술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러한 의구심의 뿌리는초대 교회에서 일어났던 정경화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콘스탄틴 대제 때까지 매우 요한 지역(동방교회)에서와 매우 유력한 교회 지도자(유세비우스, 캅파도시안 교부인 가이우스)에 의해 그 정경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으며, 주후 2세기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초기 교부들의 저작들에서도 좀처럼인용지않았다. 반면에 몬타니스트들이나 천년 왕국적 분파들과 같은 기독교 주변에 존재하던 무리들이 요한계시록에대해 급속도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요한계시록이 분파들의 신앙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자 기독교의주류 쪽에서는 요한계시록이 그 분파적 광신주의를 조장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요계시록의 정성에 대해서도 의혹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정경성 문제는 해석적이거나 신학인 요인보다는 정치적 요인에 의해서 많이 좌우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한계시록에어떠한 함이 있었다기보다는 요한계시록을 사용하는 자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말해주고 있다. 첫째로, 오늘날 교회에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제공해 주고 있다. 초대 교회에서 이미 경으로 인정을 받았고 종교개혁자들의 많은 관심을 끌어 모았던 바울 서신에 대한 신학적 논의의 역사는 길도 성하다. 반면에 초대 교회나 종교개혁시대에, 그 정경성을 의심을 받았던 요한계시록에 대한 신학적 논의의 역는 짧고 빈약하다. 만일 종교개혁자들이 요한계시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면 오늘날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교회들에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의 정도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두번째로, 요한계시록은 여러가지 신비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에 늘 이단적 분파들에게 이용당하기 쉬운 있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하여 교회가 손을 놓고 있는 동안 주류로부터 분리되어 자의든 타든 립된여러 분파들은, 자신들의 분파적 유익을 위해 요한계시록의 곡해된 해석들을 나름대로 설득력 있게 시하고있다. 그들은 요한계시록 안에 있는 신비적인 요소들을 자의적으로 강조하여 그 분파의 지도자인 자신을 더욱신화시키고, 분파적 집단을 특수집단화함으로써 그 구성원들을 결속시키며 또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데사용였다. 성경에 대한 객관적 비판 능력이 없는 일반신도들은 그러한 엉뚱한 해석들에 무차별적으로노출어 있으며,일단 그런 해석을 듣고 고정관념이 형성되고 나면 그것으로부터 헤어나오기 힘든 것이 현이다. 이처럼오늘날요한계시록은 불행하게도 거의 이단적 분파들의 전용물이 돼버리고 만 것이다.
세번째로, 요한계시록의 정경화의 과정은 우리가 어떻게 요한계시록을 대할 것인지를 말해 준다. 한국 교회단적 혹은 분파적 집단에 의해 요한계시록이 전횡되고 있는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한시록을 이단적 집단들이 왜곡하여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냉철하고도 열정적으로 노력하는녕, 요한계시록은 해석하기 난해하기에, 잘못 해석하다가는 이단과 동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전통으로 내려온 무미건조한 해석들에 안주하여 왔던 것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한국 교회의이해는 여전히 보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이것은 내가 약 2년 동안 요한계시록을여러 소에서 강의하서 내린 결론이다. 목회자든 신학생이든 평신도든, 누구도 성경으로서의 요한계시록을상식적인차원으로 읽는 경마저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21:2과 21:9에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새 예루살렘은 곧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 자명하다. 그럼도 21:9-22:5의 말씀을 소위‘내가 본 천국’으로 생각하고, 어떤 경우에는 천국을 보고 왔다는 사람들이 천국을묘사하는 데 이 본문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각하고 있는 것을보고 놀라지 않을 수 다.이처럼 내가 본 천국으로서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이해로는 특정소수 집단만이 그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이단적 해석에 대해 속수 무책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새 루살렘이 교회를 징하며, 열두 지파의 이름이 쓰여있는 열두 문은 약속으로서의 구약의 백성을, 열두 사도의이름이 쓰여 있는 열두 기둥은 그 성취로서의 신약의 백성을 상징하고 있다고 본다면, 새 예루살렘의 구성원은 어느 소수 집단이아닌 전체로서의 교회,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교회 공동체라는 자명한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우리는 느 소수 집단의 새 예루살렘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방지하고 반박할 수 있다(좀더 자세한 내용은 이 책 10장을조하기 바람).
-저자서문 중에서
[본문43-46 '2장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것인가 (1:1-8)'중에서]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이 책의 제목이다. 그러나 이 제목을 또한 이 책을 시작하는 첫 장의 제목으로 삼은 것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 이 책 전체를 걸쳐 주어질 것이지만 특별히 이 장에서 이 질문을 먼저 다룸으로써 이 책을 읽어 가는 데 길라잡이가 돼 주기를 바래서이다. 이러한 주제는 보캄(R. Bauckham)이 저술한 ‘요한계시록의 신학’1)의 제1장에서 자세하게 다룬 바 있다(독자들은 그의 책, 특히 1장을 함께 참고하여 읽는다면 훨씬 유익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다시 ‘요한계시록은 어떠한 책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볼 수 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문학형태를 묻는 질문으로서 요한계시록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첫 걸음이다. 요한계시록이 어떠한 성격의 책인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 하면 우리는 어느 책을 읽든지 그 책의 종류에 따라 읽는 자세나 감정 상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무도 소설을 과학 서적이나 시를 읽듯이 읽지는 않을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소설을 읽을 때 소설의 문학적 특징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으면, 효과적으로 독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에는 이야기체도 있고, 시적인 구조를 가진 글도 있고, 지혜문서도 있고, 역사적인 내용을 기술한 것도 있으며, 편지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도 있다. 성경에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문학 형태가 있는 것은 성경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기록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영감을 통해서 저자들의 개성과 독특한 이성 작용을 사용하심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는 요한계시록도 예외는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어느 성경의 저술보다도 그 성격이 독특하다. 그것은 저자인 요한이 본 하늘의 환상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신탁(oracle)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겉으로는 신비적으로 보인다. 이때문에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도 맹목적으로 직관적이고 신비적으로 되기 쉽다. 이러한 신비적 자세는 요한계시록을 읽는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직면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을 분석하는 것이 가능한가?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보았던 것들을 기록한 것인데 어떻게 우리의 이성을 사용해서 접근해 들어간단 말인가?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성령에 사로잡힌 특별한 사람만이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에게 익숙하며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앞에 던진 그러한 질문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의 발전이 미미했다.
실제로 요한계시록의 저작 과정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하나는 요한이 환상을 보는 가운데 혹은 보자마자 기록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요한이 환상을 실제로 본 것이 아니며 천상적 환상에 대한 언급은 심리적 현상 혹은 문학적 기교일 뿐이라는 것이다. 후자는 성경적 근거에 의해서 반박된다. 신약 시대에 바울도 삼층천에 올라갔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더욱이 신약 시대 선지자 그룹 가운데도 이러한 환상을 보고 그것을 보고한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환상을 통한 천상적 경험은 몇몇 초기 유대 기독교 묵시 문학에 있어서 중심적 역할을 하며, 헬라로마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현상의 한 형태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환상은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또한 환상을 보면서 혹은 본 즉시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고 보기에는 이 책에 너무 정교한 구조와 문학적 표현 기법이 동원되어 있으며 또한 요한 특유의 문학적 특징들이 스며들어 있다. 이러한 정교한 구조와 문학적 표현 기법들은 이미 바로 앞장에서 요한계시록의 구조 문제를 다룰 때 감지된 바 있으며 앞으로 책 전체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드러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요한이 환상을 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환상을 보자마자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묵상하고 정리해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지나치게 신비적이거나 직관적이어서는 안되며, 이성적이며 분석적인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한 자세가 결여될 때는, 수천 번을 읽어도 요한이 동원했던 독특한 문학 기법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요한계시록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 자세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은 어떠한 책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 오자. 대부분의 고대 문서는 그 첫 부분에 그 책의 성격을 밝혀 놓는다. 요한계시록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서두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우리도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1:1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아포칼립시스)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아포칼립시스’라는 헬라어 단어는 묵시 혹은 계시라는 말로 번역된다. 여기에서 ‘아포칼립시스’가 그 당시 고대 유대 사회에 유행하던 묵시 문학을 가리키는 전문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알려짐’을 의미하는 보통 명사로 쓰이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러나 이 단어가 1:1의 본문에서 쓰인 용법을 볼 때 그 의도가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아포칼립시스’라는 단어가 사용된 경우는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단 한 번이다. 그리고 다른 신약성경에서 주격이 아닌 목적격으로 일곱 번 사용되었다(눅 2:32; 롬 8:19; 롬 16:25; 고전 1:7; 고전 14:26; 갈 2:2; 엡 3:3). 이 일곱 번은 문서로서 기록되지 않은 단순한 행위로서의 ‘아포칼립시스’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1의 ‘아포칼립시스’는 하나님의 계시와 그 계시를 기록한 문서를 지칭하고 있다. 그 기록된 문서로서의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면, 공교롭게도 묵시 문학적 요소들이 이 책 전체에 걸쳐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은 어떠한 묵시 문학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묵시 문학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