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란 무엇인가 - 존 스토트 [출판사:IVP]
설교자란 무엇인가
[책 소개]
“설교자의 사명과 역할, 정체성에 관한 불후의 명작”
그간 나온 설교 관련 책들이 대부분 설교자의 설교 기술이나 설교 방법을 다루고 있다면, 이 책은 설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설교자 자신의 정체성과 자아상을 철저히 성경의 바탕 위에서 다루고 있다. 그 점이 바로 이 책을 지금까지도 대다수 설교자와 설교학자들이 손 꼽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이 책은 본디 1961년 미국 풀러 신학교의 페이튼 강연에서 강연한 내용을 확장하여 1964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거의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책의 영향력은 설교자들 사이에서는 변함 없을 정도다.)
이 책은 “설교자들의 스승”으로 불리는 존 스토트가 설교자를 청지기?사자?증인?아버지?종의 다섯 가지 은유로 풀어내는 신선하고도 실천적인 연구서다. 신약 성경에 계시된 설교자의 이상과 과업을 분명하고 명쾌하게 확립해 주는 책으로, 설교자의 메시지와 권위의 근원, 설교자의 올바른 덕성, 복음에 대한 경험, 설교자의 능력과 동기 등을 성경적 정확성과 명료한 문체로 고찰하고 있다. 이 책은 ‘성경적 설교자상’에 관한 고전이라 할 만하며, 이번에 IVP가 정식 저작권 계약을 거쳐 새롭게 번역 출간하게 되었다.
[이 책의 특징 & 대상 독자]
- 정식 저작권 계약을 통해 새롭게 완역 출간
- 설교 방법/기술이 아닌 설교자의 사명/역할을 다룬 책
- 설교자를 5가지 은유(청지기/사자/증인/아버지/종)로 고찰
- 국내 대표 설교자들과 설교학 교수들의 적극 추천
* 신학교 학부생, 신대원생, 설교 사역자
* 설교학 교수, 신학교 도서관
[밑줄 긋기 (책 속에서)]
청지기는 다른 사람의 재화를 맡은 관리자 혹은 분배자다. 이와 같이 설교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다시 말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위탁하셨고 그래서 지금 성경에 담겨진 하나님의 계시를 맡은 청지기다. 따라서 기독교 설교자의 메시지는 선지자 혹은 사도처럼 하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오지 않고, 그렇다고 거짓 선지자들처럼 설교자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지도 않고, 오직 일회적으로 계시되어 지금 현재 그가 고귀한 청지기로서 맡고 있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
- 24쪽에서 -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는 이와 같다. 말씀 연구와 설교에,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 안에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권위를 느끼도록 하기 위해 충성을 다한다. 자신에게 일을 맡긴 집주인에게 충성을 다한다. 자신에게 양식을 의지하는 가족에게 충성을 다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믿고 맡겨진 위탁물에 충성을 다한다. 하나님, 우리를 충성스러운 청지기가 되게 하소서!
- 44~45쪽에서 -
참된 하나님의 사자는 우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행위를 철저하고도 진중하게 선포해야 하며, 그런 후에 정직하고도 진지하게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믿으라고 호소해야 한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 설교자의 의무다.
- 85쪽에서 -
‘청지기’는 가정사와 관련된 은유다. 그것은 우리를 한 집으로 데려간다. 거기서 우리는 청지기에게 가족의 행복한 삶을 위해 창고를 위탁하는 집주인에 대해 생각한다. ‘사자’는 정치적인 은유다. 그것은 우리를 야외로, 말하자면 시장터나 대로변으로 데려간다. 거기서 사자는 나팔을 불어 사람들을 모은 후, 왕을 대신하여 긴급하고도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 그런데 ‘증인’은 법적인 은유다. 그것은 우리를 재판정으로 데려간다.
- 90쪽에서 -
신약이 설교자를 ‘증인’으로 칭하고 설교자에게 ‘증언’을 기대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여기에 투영된 상황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그림을 제안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판에 회부되신다. 그러나 이번에는 산헤드린 앞이나 총독 본디오 빌라도 혹은 헤롯 안티파스가 아니라, 온 세상 앞에 선 공개 법정이다. 성경이 ‘세상’이라 일컫는 것, 즉 세속적인, 불경한, 비기독교 사회, 여전히 헌신되지 않은 적대적인 바로 그 세상이 재판관역을 맡는다. 세상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판단하며 갖가지 의견을 그에게 쏟아놓는다. 마귀는 추악한 거짓말로 그를 고발하고 그의 거짓 증인들을 수백 명씩 소집한다. 성령 하나님은 ‘파라클레토스’, 변호인으로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를 증인으로 소환하신다. 기독교 설교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를 변호하고 옹호하며, 판결을 내리기 전에 세상이 반드시 듣고 고려해야 할 증거를 법정으로 가져옴으로써 예수님 편에서 증언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 90~91쪽에서 -
‘아버지’ 은유에서 설교자는 가족을 아끼고 돌보는 자로서 자신이 말씀으로 섬길 사람들과의 관계에 마음을 쏟는다. 설교는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설교자는 청중이 관객으로 머물러 있는 무대에서 혼자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배우가 아니다. 또한 왕과 백성 사이의 중개인으로서 저들도 나를 모르고 나도 저들을 모르는 상태에서 용마루에 올라가 왕의 명을 소리치는 사자도 아니다. 설교자는 자녀들의 아버지다. 사랑하는 가족 관계가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 존재한 다. 그들은 서로에게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설교 전후와 설교 중에도, 설교자는 이 관계를 의식하고 있으며 또한 그래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교자에게 초면일 수밖에 없는 공개 전도 혹은 전도 집회에서는 이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고정된 회중을 섬기는 한량없는 특권을 가진 설교자에게 이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 120쪽에서 -
설교의 목적은 듣는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지, 유희를 주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그 형식으로 비판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예술 창작물이 아니다. 설교는 “도구이지, 예술 작품이 아니다.” 설교는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며, 목적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영혼 구원’이다. 설교에 관해 설교자를 ‘칭송’하는 회중,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그러한 칭송을 은근히 기대하는 설교자는 모두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들이라고 나는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을 설교하라고 부름받지 않고, 오직 구원자요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설교하라고 부름받았다(고전 1:23; 고후 4:5). 따라서 중요한 것은 선포되는 그리스도 그분이시지, 그를 선포하는 인간이 아니다. 이와 다르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일 뿐 아니라 설교자의 사역 전체를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써, 우선을 불신을 살 것이요 결국에는 패망할 것이다.
- 154쪽에서 -
우리가 묻고 답해야 할 마지막 질문이 여기에 있다. 설교자가 이 신적인 능력의 매개가 될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능력의 통로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 안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이 성취될 수 있는가?(요 7:38, 39을 보라) 나는 두 가지 근본적인 조건이 있다고 믿는다. 거룩함과 겸손.
- 182쪽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