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여, 낮은 곳에 서라 - 길을 잃고 표류하는 우리 사회의 유일한 희망 - 한완상 [출판사:포이에마]
한국 교회여, 낮은 곳에 서라 - 길을 잃고 표류하는 우리 사회의 유일한 희망 - 한완상
한국 교회여, 낮은 곳에 서라 - 길을 잃고 표류하는 우리 사회의 유일한 희망 - 한완상
예수는 저 낮은 곳에, 교회는 저 높은 곳에!
예수의 정신을 헌신짝처럼 버린 교회를 향한 경종과 희망의 메시지
《예수 없는 예수 교회》에 이은 ‘교회 힐링 메시지’ 제2탄! 시대의 흐름에 영합하지 않으며, 그 시대의 약자와 밑바닥 인생들의 벗이 되어주셨던 갈릴리 예수! 그의 삶을 재조명함으로써 상향 지향적 행태를 보이는 한국 교회에 철저한 반성을 촉구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책! 서민들과 함께 사신 예수, 지배 세력의 허위의식을 폭로하신 예수, 그에게서 배워야 할 낮아짐의 정신, 예언자적 안목, 개혁 의지, 민중과의 동고 의식을 애정 어린 질책과 함께 절제된 언어로 풀어냈다.
1970년대 후반, 한국 교회를 바라보며 가슴으로 부르짖은 저자의 외침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역사의 아이러니! 이런 현실 앞에 저자는 크리스천들이 믿고 따라야 할 역사적 예수상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분법적 사고와 권위주의에 빠져 이상적 공동체의 특성을 잃어버린 한국 교회의 환부에 날카로운 매스를 들이댄다. 그리고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낮은 곳으로’ 내려가 섬기는 삶을 살자고 한국 교회와 크리스천들을 독려한다.
제1부에서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역사적 현장에서 활동하신 예수의 발자취를 추적함으로 멸시당하고 천대받던 ‘땅의 사람들’과 어울렸던 예수의 모습을 새롭게 조명한다. 제2부에서는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좀처럼 고쳐지지 않고 있는 환부를 지적하고, 제3부에서는 예수의 정신이 투영된 세상과 교회의 모습을 조망하며, 제4부에서는 예수의 삶과 정신을 본받아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할 당위성을 말한다.
▶ 책 속에서
조지 부시(George W. Bush)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신보수주의 정치 세력의 핵심부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다름 아닌 기독교 우파였습니다. 그들은 부시 대통령의 정책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올곧고 신랄한 역사의 평가가 내려질 것입니다. 근본주의 신앙이 권력과 결탁할 때 권력은 더욱 오만해집니다. 안으로는 서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밖으로는 국제적 불신과 경멸을 받게 되지요. (…) 오늘날 한국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닫힌 신앙이 닫힌 정치와 힘을 합하여 민주 정치를 후퇴시키고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아니 이미 그 높은 곳에 우뚝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호령하는 한국 교회들이 여기저기 나타나는 듯하여 참으로 민망하고 안타깝습니다. --pp.16
예수께서 무상으로 병자들을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사람들을 먹이시자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수한 군중을 보신 예수는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 하지도 않으셨고, 큰 교회를 꾸리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셨지요. 왜 그러셨을까요? 당신을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의 아우성 속에서 광야에서 자신을 시험했던 사탄의 속삭임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유혹을 이겨내는 데 실패한 한국 교회는 오늘도 저 높은 곳을 향해 겁 없이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습니다.--pp.17-18
종교를 믿으려는 인간의 심리는 무엇일까요? 종교에 귀의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일종의 변형된 쾌락원리가 깃들어 있습니다. 초파일에 빈 마음 없이 절에 가서 복 받고자 하는 마음이나, 점쟁이와 작명가를 찾아가는 시정인의 마음이나, 악귀를 쫓아내려고 무당 판수를 부르는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한결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화와 고통을 피하고 값싼 안락과 영광을 얻으려는 것이지요. 이러한 종교적 심성은 한마디로 ‘저 높은 곳’, ‘영광스러운 곳’, ‘황홀한 곳’, ‘안전한 곳’에 영원히 거하려는 마음이기에 탈역사적이고 탈사회적입니다. 그런데 한국 크리스천들 역시 이런 종교적 쾌락원리를 따르고 사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름만 크리스천이지 실제로는 그저 값싼 은총을 바라는 탈역사적 종교 심성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pp.57-58
사랑이라는 말은 공감(共感) 또는 동고(同苦)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공감이란 타인의 입장에 서서 그의 느낌과 생각에 깊이 동참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공감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초월, 자기극복, 자기 부정을 해야 합니다. 공감 받는 사람의 입장에 서려면 반드시 먼저 자기를 비워내야 합니다. 자기를 비우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지 않고서, 즉 자기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절대로 남과 공감할 수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러한 행동을 공감 아닌 동정과 자선 행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공감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행위를 필요로 합니다. --pp.271-272
▶ 출판사 리뷰
예수는 저 낮은 곳에, 교회는 저 높은 곳에!
예수의 정신을 헌신짝처럼 버린 교회를 향한 경종과 희망의 메시지
《예수 없는 예수 교회》에 이은 ‘교회 힐링 메시지’ 제2탄! 시대의 흐름에 영합하지 않으며, 그 시대의 약자와 밑바닥 인생들의 벗이 되어주셨던 예수의 삶을 재조명함으로써 상향 지향적 행태를 보이는 한국 교회에 철저한 반성을 촉구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책! 서민들과 함께 사신 예수, 지배 세력의 허위의식을 폭로하신 예수, 그에게서 배워야 할 낮아짐의 정신, 예언자적 안목, 개혁 의지, 민중과의 동고 의식을 애정 어린 질책과 함께 절제된 언어로 풀어냈다.
저자가 1970년대 한국 교회를 바라보며 가슴으로 써내려간 《저 낮은 곳을 향하여》 중에서 지금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은 골라내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들만 모아 다시 정리했다. 《저 낮은 곳을 향하여》가 처음 세상에 나오고 벌써 31년이 흘렀다. 그 사이 한국 교회는 매일 더 높은 곳을 향해 꾸준히 발걸음을 옮겼고, 이제 세속 권력의 정점에도 대형 교회 장로가 앉아 있다. 기껏해야 권력이 휘두르는 횡포에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축복하는 수준이었던 30년 전에 비하면 오늘날 교회의 권력은 실로 막강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70년대에 저자가 지적했던 한국 교회의 병폐는 하나도 고쳐지지 않았고, 어떤 것들은 더 악화되기도 했다. 오늘도 변함없이 한국 교회는 처절한 역사와 참혹한 현실에서 구원과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던 예수의 모습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득권을 대변하고 교회 규모를 키우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다. 이런 현실 앞에 저자는 크리스천들이 믿고 따라야 할 역사적 예수상을 분명하게 밝히고, 예수가 가셨던 길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 교회의 환부에 다시금 날카로운 매스를 들이댄다. 그리고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하나님 나라, 즉 ‘사랑이 지배하는 새 질서’를 위해 낮은 곳으로 내려가 섬기는 삶을 살자고 한국 교회와 크리스천들을 격려하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 30년 세월에 더 곪아터진 환부
지금 한국 땅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파 교회들이 모두 모여 있는 듯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 교회도, 장로 교회도, 감리 교회도 모두 한국에 있다. 놀라운 양적 성장을 이룬 거대한 교회들이 육중한 몸집을 뽐내며 여기저기 우뚝 버티고 서 있다. 그런데 정작 “새 세상, 새 역사를 만들어갈 생명체로 가득차야 할 방주 안에는 방주 밖에 있는 생명체보다 더 탐욕적이고 더 교만한 생명체들이 득실거리고 있다”고 저자는 한탄한다. 교회와 교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비아냥거림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 교회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까닭을 높은 곳에 우뚝 서기를 즐기는 교회의 태도에서 찾는다. 높은 곳에 올라가야만 영광의 교회, 힘 있는 교회, 세상을 내려다보고 호령할 수 있는 이른바 성공한 교회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이런 태도는 사실 세속적 탐욕과 한 치도 다를 바가 없다고 말이다.
어느 모로 보나 교회 권력은 30년 전에 비해 실로 막강해졌다. 그런데 교회의 위상은 어떠한가? 높아진 권세만큼 세상의 인정과 존경을 받고 있는가? 조지 W. 부시 정권에서 기독교 우파들이 저질렀던 실수를 되풀이하듯 오늘날 권력의 변호인으로 전락한 한국 교회를 바라보며 저자는 근본주의 신앙이 권력과 결탁할 때 권력은 더 오만해지는 법이라고 경고한다.
♣ 역사적 현장에서 만난 예수
예수를 따르며 사는 사람들, 즉 이 땅의 크리스천들을 가리켜 저자는 ‘예수따르미’라 부른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예수는 어떠한 예수일까? 제1부에서 저자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역사적 현장에서 활동하신 예수의 발자취를 추적함으로 이 물음에 답한다.
예수 당시 로마 통치자들은 목에 힘을 주어 ‘팍스 로마나’를 외치며 가는 곳마다 길을 닦고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였다. 그러나 식민지 민족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강압 정치 아래에서 그들의 구호는 피 묻은 거짓 깃발에 불과했고, 민중의 호주머니를 털어 이룬 업적일 뿐이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종교적 기득권층이 모세의 전통을 잇는 사람은 자기네들뿐이라며 가난하고 무지한 민중을 경멸하고 죄인으로 정죄했다.
그러면 이들과 같은 시대를 살며 억압적 권력이 휘두르는 횡포를 온몸으로 체험하신 예수께서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셨을까? 예수는 그럴듯한 껍데기 속에 감춰진 이들의 뱀 같은 교활함과 독사 같은 표독스러움을 꿰뚫어보고, 사회의 구조적 불의를 지탱해주는 이들의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삶을 사셨다. 저자는 바로 이런 예수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상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형편은 어떠한가? 과연 예수를 따라야 할 크리스천들이 그분의 정신대로 이 시대를 지배하는 허위의식을 꿰뚫어보고 그것을 폭로하고 있는가? 이 허위의식이 합리화하는 악의 구조를 비판하고 있는가? 기독교 신자는 늘어나는데 예언자의 안목을 지닌 예수따르미들이 이렇게 적은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그 원인을 개인의 영혼 구원만 강조하고 사회 구원은 하찮은 것, 반신앙적이고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폄하하며 정죄하는 보수적 교회들의 그릇된 가르침에서 찾는다.
♣ 한국 교회의 일그러진 자화상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실제로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무엇일까? 제2부에서는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탐구한다.
기독교가 처음 이 땅에 들어오던 시절에만 해도 교회와 크리스천들은 애국애족의 마음으로 민주주의를 꿈꾸며 민족주의 운동의 선봉에 섰던 선구자들이었다. 그러던 한국 교회가 이 땅에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둥지를 틀자마자 초기의 정신을 버리고 근본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권위 의식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나와 조금만 달라도 용납하지 못하는 이분법적 사고와 율법주의적 사고에 발이 묶여 분열을 반복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분열을 발판으로 양적인 성장을 이루기도 했다. 집안싸움에 귀한 힘을 허비하느라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하지도 못했고,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결국 사이비 신흥종교가 퍼져나갈 수 있는 토양을 교회가 마련해준 셈이다.
이 밖에도 저자는 여성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교회, 근본주의에 사로잡혀 젊은이들의 기백을 빼놓는 교회, 양적으로는 팽창하나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의 병폐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 이 땅에서 이뤄야 할 사랑 나라
그렇다면 기독교 사상, 즉 예수의 정신이 실현된 세상과 교회의 모습은 어떠할까? 제3부에서는 예수의 정신이 투영된 세상과 교회의 모습을 조망한다.
무엇보다 저자는 인간을 ‘꼭두각시’로 전락시킨 산업 사회에서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를 꿈꾼다. 그 밑바탕에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과 함께 어울리며 인간을 이해하려 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깔려 있다. 이런 세상에서는 누구나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고 필요에 따라 보상을 나누는 올바른 노동 윤리와 목표를 이루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당한 절차를 지키는 절차 윤리가 뿌리를 내릴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회주의와 편법주의는 발을 붙일 수 없게 된다.
덧붙여 저자는 보수와 진보가 서로 용납하고 공존하는 세상, 비인간화를 촉진하는 교육 현실에서 깨어진 인간을 온전케 하고 예수의 품성을 심는 세상을 교회가 앞장서서 이루어나가자고 말한다. 이러한 세상이 저자가 꿈꾸는 세상이고, 더불어 예수의 정신이 깃든 세상이다.
♣ 한국 교회, 낮아지는 것만이 희망이다!
제4부 첫 장에서는 먼저 한국 교회가 걸어온 길을 반추하며 되살려야 할 아름다운 유산과 회개해야 할 죄과를 분명히 밝힌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교회가 저지른 잘못을 정직하게 회개하고, 낮은 데로 흐르는 물처럼 낮은 곳으로 흘러 메마른 이 땅을 적시고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는 공감자로 사는 삶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삶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려면 설교자는 먼저 회중에게 기쁜 소식이 무엇인지를 면밀하고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예수따르미들은 이기적인 기복 신앙에서 벗어나 자기를 비우고 타인의 입장에 서서 그의 느낌과 생각에 깊이 공감하는 자기부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시는 예수를 뒤로 하고 오늘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안간힘을 쓰는 한국 교회를 바라보며 저자는 다시 한 번 소리친다. 갈릴리 예수와 함께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자고 말이다. 1970년대 후반, 한국 교회를 바라보며 가슴으로 부르짖은 저자의 외침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에 비통함을 느끼며 우리 모두 겸손하게 이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