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나 나는 꿈꾸는 청년이고 싶다- 류태영 [출판사:국민일보]
언제까지나 나는 꿈꾸는 청년이고 싶다
류태영 박사 자전적 에세이
언제까지나 나는 꿈꾸는 청년이고 싶다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못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집안에서 유일하게 국민학교에 입학했고, 남들보다 늦은 나이인 열 여덟 살에 비로소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는 무작정 상경, 구두닦이, 신문팔이, 아이스 케이크 행상 등을 하며 겨우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찌들어지게 가난했고 장래를 보장받을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었지만, 그는 구두닦이를 하면서도 유학의 꿈을 꾸었고, 이틀을 굶고서도 비관은커녕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신 분께 감사했다. 꿈꾸는 청년 류태영에게 그 꿈이 현실로 다가왔다. 유학이라는 말을 처음 접한지 13년만에 구두닦이 소년 류태영은 덴마크 국비 장학생으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본문 190면 참조)당시 우리나라와 덴마크는 수교도 없던 터라 그의 유학, 그것도 편지 한 통 쓰고 그 나라의 초청을 받아 유학가는 경우는 거의 기적이었다.
덴마크 말이라고는 알파벳도 모르던 그가 까막눈으로 시작한 덴마크 유학생활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본문 205면 참조)
그는 아무도 의지할 곳 없는 그곳에서 또다시 꿈을 꾼다. 그 나라에서만이 아닌 전세계를 순회하며 농촌을 비교연구하겠다는 당찬 꿈을...
무일푼이었지만, 그는 덴마크 정부 특별 예산 약 3만 달러를 지원받아 유럽의 여러나라를 여행하며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본문 235면 참조)
결국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해보기도 전에 안될 것이라고 포기하는 우리의 마음자세가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일화이다.
귀국후 그는 청와대의 초청으로 우리나라에 새마을운동을 전개하는 핵심에서 일하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대통령의 감동을 자아냈던 그의 강의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본문 249페이지 참조)
모든 것이 안정되고 아무 걱정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현실에 안주할 수 없었다. 또 다시 이스라엘 유학의 꿈을 꾸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당시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만류가 있었지만 우리나라 농촌의 발전을 위해 공부를 더 하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것이 그와 육 여사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1973년 4월, 나이 37세에 류태영은 이스라엘 국비장학생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그는 최단시일(4년 반) 내에 이스라엘 최고 명문인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아 주위를 놀라게 했고, 동양인 최초로 이스라엘 국립대학인 벤구리온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류태영은 이스라엘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인물이 되었다.
7년간의 이스라엘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게 된 것도 그의 조국사랑에 기인한다.
그는 아무리 그곳에서의 생활이 안정되고 인정을 받아도 한시도 조국을 잊어본 적이 없었기에 결국 귀국, 모교인 건국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내년이면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 류 박사는 현재 건국대학교 농업교육과 교수, 도산아카데미연구원 원장, 대산농촌문화재단 이사장, 한국.이스라엘 친선협회 상임부회장 등으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며, 우리나라 및 전세계 각국에 다니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연을 해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과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류태영 박사는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역경 속에서 갖은 시련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힘이 되어 주자는 뜻에서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극복해 낸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에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 글을 쓰며 무엇보다도 진솔성을 유지하기 위해 마음을 비우려 부단히 노력하였고 진실한 이야기만을 쓰고자 노력했다. 그러기에 너무도 가난했던 집안 사정을 숨김없이 밝혔고, 천하게 살아온 청소년 시절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진실은 진실에게 통하며 진실이 마음의 문을 두드릴 때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고 믿으며...
어린시절
류태영 박사는 전북 임실에서 더 들어간 산골마을 청웅에서 태어났다. 재산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다가 형제는 모두 8남매나 되었다. 위의 형과 누나 넷은 국민학교에 발도 붙여보지 못한 채 열심히 일만 했다. 아버지는 머슴으로 일하셨고 남은 가족들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품팔이를 해야할 정도로 가난한 살림이었다.
어느날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태영이는 영리하니까 학교에 보내야 합니다. 집안에서 한사람 정도는 까막눈을 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을 사람들의 권고를 들은 부모님은 마치 해외유학이나 보내듯이 큰맘먹고 태영을 국민학교에 입학시켰다. 어린 태영은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 외에는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가서 나무 해오는 일이 전부였다. 하루 세끼를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나마도 거의 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많았다.
어린 태영이 국민학교 5학년 되던 해에 이 가난한 산골마을에 조그만 교회가 들어섰다. 초가집을 빌려서 시작한 교회, 그곳은 가난에 찌든 소년의 유일한 기쁨의 장소가 되었다.
어린나이였지만 그는 새벽기도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첩첩산중이라서 깜깜한 새벽이면 무서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믿음으로 이겨냈다. 이때부터 새벽기도는 그의 삶에 있어서 떼어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졸업 후 그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풀을 베며 소를 먹이고 토끼를 키우는 일로 일과를 보냈다. 하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토끼 몇 마리를 장에 내다 팔아 '중학교 강해'라는 책을 샀다. 중학교 강해를 독학하며 실력을 쌓다 열여덟 살에 읍내에 나가 가정교사로 취직해 중학교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1954년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지긋지긋한 고생이 시작되었다. 굶는 날이 먹는 날보다 더 많았고 그나마도 국화빵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 미군부대 주변에서 구두를 닦으며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다. 쓰레기통에서 곰팡이 난 빵을 꺼내어 먹기가 일쑤였다. 엄동설한에도 내의 한번 입어보지 못했다. 냉방에서 담요 한 장에 의지한채 삶을 이어나갔다. 너무나 추워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새벽에 일어나 방안을 빙빙 뛰기도 했다. 그러다가 통금해제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면 성경과 찬송가를 챙겨들고 교회로 달려갔다. 뜨겁게 기도하고 나면 온몸이 화끈거렸다. 새벽에 그가 드린 기도는 오로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가 전부였다. 도무지 가능성이라곤 없는 삶이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덕분에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게 된 것이 너무도 감사했던 것이다.
구두를 닦으면서 생활하던 중 그는 우연히 '유학'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가 '유학'이 뭐냐고 묻자 "외국에 나가 훌륭한 선생들 밑에서 공부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유학의 꿈
그때부터 그는 유학의 꿈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그것은 너무도 허황된 꿈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의 삶을 지탱해준 좌우명이었던 성경말씀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는 말씀에 의지해 기도하며 꿈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어느 나라에 가서 공부할 것인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가난한 농촌을 잘살게 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선진 농업국가인 덴마크로 가자"라는 답을 얻었다.
이제 그 꿈을 현실로 실현시킬 일만 남은 것이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며 한국의 농촌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리고는 한국의 농촌현실과 함께 그의 사상을 피력한 다음 덴마크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영어로 완성시켰다. 이제 편지를 부치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누구에게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고민하던 중 '그 나라의 가장 높은 사람에게 보내라'는 마음의 확신이 들었다. 가장 높은 사람이 왕인지 대통령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도서관에 가서 확인한 다음 편지의 겉봉투에 이렇게 썼다.
'프레드릭 9세 국왕. 코펜하겐. 덴마크'
주소도 없이 그렇게만 쓴 편지를 부치고 난 후 약 40일쯤 지난 어느날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바로 덴마크의 국왕 보좌관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며칠 후에는 덴마크의 외무성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왕복 비행기표까지 동봉되어 있었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덴마크의 국왕이 무엇을 보고 구두닦이 청년을 초청한단 말인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꿈이 변하여 현실로(덴마크 유학)
1968년, 꿈에도 그리던 덴마크 유학길에 올랐다. 국왕의 초청을 받은 구두닦이 청년은 코펜하겐 공항에서부터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았다. 덴마크의 신문들이 일제히 한국에서 온 류태영을 집중보도했다.
덴마크의 한 대학에서 농촌사회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덴마크의 농촌은 한국과 너무나도 현격한 차이가 있어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외무성 국제협력국장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덴마크 한 곳에 머무르는 것보다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비교연구를 하고싶다며 도움을 청했다.
그가 정한 나라는 이스라엘이었다. 한손에는 총, 한손에는 괭이를 들고 있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분단된 한국의 실정과 가장 비슷한 나라. 그는 바로 이스라엘의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한국에서 덴마크에 유학온 학생이다. 이스라엘의 키부츠에 대해 배우고 싶다. 가능하다면 이스라엘의 협동농장과 농촌부흥 모습을 배울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
얼마후 이스라엘 대사관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이스라엘에 가고싶은 날짜가 언제인가?"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편지 한 장이 이스라엘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여 유학허가를 받아낸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유학의 90% 이상은 모두 미국행이었다. 그런데 그는 아무도 생각 못했던 덴마크와 이스라엘 유학을 실현시킨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
1971년 건국대학교 교수시절, 그의 농촌운동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되면서 청와대 비서실 새마을담당으로 발탁되었다. 농민들이 잘살기 위한 운동이라면 적극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3년 동안 청와대 새마을 담당으로 일하면서 그는 능력의 한계를 절감했다. 다시 이스라엘로 들어가 이스라엘 당국과 접촉한 결과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유학의 길을 떠났다.
이스라엘로 떠나기 전에 인사차 육영수 여사를 만났더니 "류 선생이 잘 도와주어서 새마을운동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가버리면 어떡하느냐"며 만류했다.
1973년 4월 이스라엘 유학길에 다시 올랐다. 그때 그의 나이 37세였다. 늦은 나이에 본격적인 공부를 결심하고 나니 언어의 장벽이 가장 큰 문제였다.
기도하면서 계획을 세웠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용하는 최소한의 문장은 5백개이다. 주일을 제외하고 하루에 열마디씩 외자. 결심하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매일 열마디씩 외어 나갔다. 3개월만에 5백 마디의 문장을 모두 습득하게 되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유학온 지 8개월만에 히브리대학교 대학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곳에서 그는 4년 반만에 박사학위를 받고 동양인 최초로 이스라엘 최고의 명문대학에서 히브리어로 농촌사회학을 강의하는 교수가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 살이었다.
7년동안의 이스라엘 생활을 마치고 귀국, 모교인 건국대학교에 몸담게 되었다. 그리고 농어촌을 다니면서 강연을 했다.
환경, 그것은 원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우리는 두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맞서서 극복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절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