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과 복음 - 장진광 [출판사:두란노]
희년과 복음 - 장진광
땅도 쉬고, 사람도 쉬어야 한다. [이 책은] “희년과 복음은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희년의 의미를 깨닫고 희년의 정신을 회복할 때
희년의 백성들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인간의 욕망에 브레이크를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희년법 정신의 핵심 사상은 자유와 평등을 향유하는 사회제도의 구현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올바른 관계성의 회복, 즉 희년법적 관계성의 회복에 있다 할 것이다. 희년은 이미 선포되었다.
>>본문 중에서 구약성경 레위기 25장은 안식년과 희년으로 대변되는 성경의 토지 제도를 가장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구약성경 여호수아 12∼22장에서도 토지 분배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성경은 사람을 하나님의 것을 일정 기간 빌려서 사용하는 소작농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청지기의 개념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성경은 또 사람들이 임의로 분배 받은 토지의 경계표를 이동할 수 없도록(신 19:14) 해 소유에 대한 욕심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인간은 평생의 삶 속에서 언제나 소유권과 사용권을 구분하면서 살아갈 것을 요청받고 있다. 우리는 피째 먹으려는 속성이 있는데, 그것은 소유권을 행사하려는 무의식적인 욕구다. 마귀는 이런 인간성에 기초하여 유혹을 행사한다. “너희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사용권자의 의식을 극소화하고 소유권자의 의식을 극대화하라”는 유혹이다. 마귀는 이 세상에서 소유권의 확대와 자기 과시적인 소비가 성공의 징표라는 문화 분위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특히 자본주의사회에서 그랬다. 소유권의 확대와 그 행사는 자기 왕국을 이룩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신앙의 거품을 제거하고 본질을 회복하려는 신앙적인 구조조정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상황이다. 한국 교회 앞에 ‘금융위기’가 서성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는 종교적인 기득권에 집착하면서 거기에 도취되어 그 중독의 후유증으로 몽롱해져 있다. 이렇게 말하는 필자를 향하여 손에 창을 들고 일어나 달려오는 ‘비느하스’가 있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던 비느하스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리워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기복주의와 성장주의 그리고 배타적인 구원론 중심의 신앙 위에 터를 다시 닦지 말고 하나님 나라 중심의 신앙으로 가는 중심 이동을 확실하게 이루어야 할 시간이다. 그것들은 모두 인간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탐욕으로 왜곡되고 굳어진 신학 이론에서 나온 이념화된 근본주의적 신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신앙고백을 비틀어야 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절대소유권자’라고 고백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하며 우리 앞에 우뚝 선 신앙의 깃발이 되어야 한다. 소유권(의식)을 반납하고 사용권(의식)을 회복하는 희년법적인 신앙의 실천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우선적인 과제가 되고 있다. 그것은 또한 한국 교회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시금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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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대천덕 신부 장진광 목사님의 책 「희년과 복음」을 추천할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희년이라는 개념은 항상 젊은이의 마음을 흥분시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역을 시작하면 그들의 머리에만 남아 있는 한낱 단어에 불과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 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율법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이 희년을 연구하지 않는지 의아스럽습니다. 레위기 25장에 나온 것처럼 희년을 지키지 않는 것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더욱이 토지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분의 소유물인데도 마치 제조된 상품인 것처럼 매매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어지는 일이며, 다른 신(神)인 바알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일입니다. 이 심각한 문제는 재침례교도나 메노파교도들(Menno- nites)이 가끔 거론했을 뿐, 지난 150년 동안 교회에서 제도적으로 기피되었습니다. 장 목사님은 이 책에서 희년의 실제적인 측면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의 영적 중요성과 복음과의 연관성을 밝혀 줍니다. 예수님이 “주님의 해를 전파하기 위해서 왔노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의 해는 희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여기에 ‘열납될 만한’(acceptable: 헬라어로는 데크토스) 희년이라고 수식어를 덧붙이셨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열납될 만한 제사는 자원하는 제사였습니다. 누가복음 4장 19절은 ‘자원의 희년’(또는 자원적인 주님의 해)이라고 번역되어야 하는데, 개역 성경에는 ‘주의 은혜의 해’로 잘못 번역되어 있습니다. 자원의 희년은 성령이 120명의 문도에게 임하시고, 그들과 함께한 무리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며(코이노니아[koinonia]), 그들 가운데 핍절한 사람이 더 이상 없을 때(행 4:32) 성취되었습니다. 사도들 사이에서 희년의 원칙이 실제로 적용된 것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기업’과 ‘대속’(구속)을 언급했습니다.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이며, 토지에 관한 모세의 율법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토지에 관한 하나님의 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대속이나 기업과 관련된 하나님의 법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중요한 주제를 다룬 이 책에서 영적이고 신학적이고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원의 희년을 전파하려 함이라”고 하기 전에 언급하신 말씀을 기억해 봅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란 말씀을 먼저 하셨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주님처럼 우리에게도 이것이 첫 번째 과업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관심을 이 중요한 문제로 돌리게 하신 장 목사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