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신학 개요 & 칼빈, 그후 500년 칼빈 탄생 500주년 맞이 기념 대작 <한국칼빈학회>에서 칼빈의 신학을 집대성하다
칼빈의 전공자의 25명이 자신의 연구 주제를 기도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칼빈에 대한 가장 전문성이 있고 공신력이 있는 칼빈에 대한 교과서가 될 것이다. 칼빈이 태어난 지 50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에 ‘한국칼빈학회’에서 한국의 신학생과 목회자, 그리고 대학생과 평신도가 두루 읽을 수 있는 칼빈에 대한 교과서적 서적을 출간한다. 이 책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칼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칼빈 전공자들이 자신의 연구 주제를 기도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가장 전문성 있고 공신력 있는 칼빈에 대한 교과서가 될 것이다. 둘째, 칼빈에 대해 더 자세히 알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꼭 필요한 필독서요 안내서가 될 것이다.
* 책 소개 칼빈 탄생 500주년의 의미 2009년은 칼빈이 태어난 지 꼭 50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로, 국제적으로 다양한 기념행사를 한창 진행 중이다.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그를 존중하고 그의 신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칼빈은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16세기 종교 개혁 시대에 교회와 신학이 가야 할 방향을 상징적이고 함축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탁월함이 있다. 그는 하나의 기독교 세계였던 중세 유럽 안에서 역동적인 개신교의 교회들이 형성되면서 근대 세계로 접어드는 역사적 과도기에 태어나서 활동했다. 중세 기독교 천 년의 문명이 해체되면서 유럽이 전혀 새로운 근대 사회로 재편되어 가던 16세기라고 하는 대 격변기에 신학을 전개했던 것이다. 따라서 개신교의 입장에서 보면 그 시대는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의 확립과 그 젊은 교회의 확장이라는 매우 긴요한 시대적 요구들이 복합적으로 존재했던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의 신학은 변혁기였던 16세기 이후 유럽과 북미 대륙에 있어서 거의 유일한 국제적인 신앙이었으며, 서양인의 신앙과 영적인 삶, 그리고 서양 사회와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칼빈은 그의 영향력을 프랑스의 위그노와 스위스의 개혁주의, 독일의 개신교, 네덜란드의 칼빈주의, 잉글랜드의 청교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헝가리와 폴란드의 종교 개혁주의, 이태리 북부의 신앙 공동체 등 전 유럽에 끼쳤다. 그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가장 국제적인 종교 개혁자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 연구는 오늘날 여전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둘째, 칼빈 연구는 결국 아시아 기독교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형성하는 중요한 작업이 되기도 한다. 현대 기독교는 유럽과 북미는 물론,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반 문명권을 포함하고 있다. 각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가 미래를 향한 신학적 방향을 모색할 때마다, 신학자들은 기독교 전통으로 돌아가 과거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렇다면 서양을 이해하는 창문으로도 지칭되는 칼빈을 아시아에서 열정적으로 연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대답은 아시아의 선교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아시아의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된 교회 운동이 아니라, 서양의 선교사들에 의해서 기독교 그 자체로서 전래되었다. 즉 서양의 장로교회 혹은 개혁교회 선교사들에서 의해서 아시아의 개신교가 세워졌기 때문에 칼빈의 신학은 교회의 한 분파라기보다는 기독교의 복음 그 자체로 이해되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칼빈의 신학은 영적으로 어둡던 시기, 옛 것을 새 것으로 대체 해야만 했던 교회적 사회적 격변기에, 교회와 인간 사회를 건강하게 세워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신학이었다. 칼빈의 위대한 점과, 그의 가르침이 아시아 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칼빈의 생애와 사상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며, 1564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주로 활동했다. 1538년에서 1541년까지의 3년을 제외하고는, 1536년에서 1564년까지 평생을 제네바라는 도시국가의 한 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가장 국제적인 영향을 끼친 탁월한 교회 지도자요, 개신교 신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신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면, ‘칼빈의 신학’을 형성한 그의 생애와 사상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첫째, ‘칼빈의 신학’은 인생이라고 하는 광야 학교를 통해서 형성되었다. 칼빈은 개신교 신앙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화형을 당했던 수많은 동족 프랑스 개혁교인들을 지켜보아야만 했으며, 그 스스로도 종교적 난민이었다. 칼빈 자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또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던 제네바로 부름을 받았지만(1536-1538), 3년도 못 돼서 추방되는 수치감도 겪었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미망인 ‘드 뷔르’를 아내로 맞았으나(1540) 10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사별해야 했으며,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사망(1542)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칼빈의 삶은 이렇듯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이끌어진 하나님의 훈련의 과정이었다.
둘째, 칼빈은 성경에 근거한 새로운 차원의 경건과 개혁된 예배의 틀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칼빈은 새로운 교파를 세워 지도자가 되어 보겠다는 야망을 가진 교회 정치가가 아니었다. 모든 교회가 가톨릭이던 환경 속에서 그는 성경에 기초한 교회를 세우려 했는데, 이런 순수한 노력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새로운 교회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경건과 예배는 유럽 사회의 새로운 영적 기반이 되었다.
셋째, 칼빈은 자신의 교회를 역사적 교회, 즉 초대 교회와 교부들과의 연속성 속에서 확립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칼빈의 모든 저작은 수많은 교부들의 인용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중에서 당연히 어거스틴이 으뜸이었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이 아니라 개신 교회가 역사적이며 전통적이라는 칼빈의 신념을 반영한다.
넷째, 칼빈은 종교 개혁 교회의 다양한 흐름이 하나로 연합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따라서 칼빈은 로잔(1536)이든 베른(1536)이든 하게나우(1540)이든 보름스(1540)이든 레겐스부르그(1540)이든 주저하지 않고 달려가 개신 교회의 연합을 도모했다. 또한 칼빈은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 항상 주변 도시의 종교 개혁 지도자들과 서신을 교환하면서 의견을 나누었다.
다섯째, 칼빈의 신학은 현장(praxis)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칼빈은 삶과 관계없는 사변적이고 공허한 신학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그는 역사의 현장과 맞닿아 있는 교회의 교사(Doctor ecclesiae)였다. 따라서 칼빈은 장로 제도와 집사 제도 등 교회의 직제를 구체화했다.
여섯째, 결과적으로 칼빈의 신학은 심오한 학문적 체제와 내용을 갖추면서도, 가난한 자들과 난민들을 위한 구제와 복지라는 사회적 측면을 함께 포괄하는 통전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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