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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함께 걷는 삶-헨리 나우웬 [출판사:IVP]

예수님과 함께 걷는 삶-헨리 나우웬

예수님과 함께 걷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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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묵상.
헨리 나우웬이 헬렌 데이비드(Sr.Helen David)의 그림 시리즈를 보고 영감을 얻어 쓴 묵상집.

저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길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고통받고 수난당하는 가난한 이웃들을 돌아보도록 우리를 이끈다. 수감되어 있는 정치범, 무거운 짐을 나르는 농부, 버림받은 아이,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어머니, 소진한 농부, 순교한 여성도, 남편을 잃은 여인…. 각 장마다 이러한 그림과 함께 그림 속의 인물들과 예수님의 수난을 연결짓는 묵상 글이 실려 있다. 우리는 책 전체를 통해 예수님이 재판받으시는 곳부터 죽음과 부활의 장소까지 이 시대의 이웃들과 동행하게 된다.
헬렌 데이비드의 그림은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다. 이 책에 실린 그림은 인류의 고통을 담고 있지만 결코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본서는 몸소 고난당하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에 주목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읽는 이들에게 소망을 품게 해준다.

>>본문 47-57쪽 '제6장 예수님이 베로니카를 만나시다'중에서

제6장 예수님이 베로니카를 만나시다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이것은 '사라진'남편의 사진을 손에 들고 있는 필리핀 여인의 외침이다.
그녀의 눈빛은 동정을 호소하고 있으며, 입가에는 깊은 슬픔이 어려 있다. 그녀의 얼굴에는 간절한 기대가 역력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고통, 나의 아픔이 보이십니까? ...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남편이 갑자기 어디론가 가 버린 이후로, 1분 1초라도 괴롭지 않은 순간은 없었습니다. 그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감옥에 있나요? 고문을 당하고 있나요? 죽었나요? 살아 있나요? 제발 대답 좀 해주세요! 그이가 죽었다면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라도 말해 주십시오. 그래야 가서 울기라도 할테니까요. 세상 사람들! 내 말 좀 들어 보세요! 나 좀 보세요! 대답 좀 해주세요!

이 필리핀 여인은, 남편과 아들이 갑자기 실종되어 다시는 만나지 못한 수천 명의 고통받는 여인을 대표한다. 아르헨티나와 과테말라뿐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에도 이런 여인들이 있다. 이들은 인간의 가장 깊은 상처를 보여 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 즉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형제 자매 사이의 관계가 잔인하게 찢긴 모습을 보여 준다. 대규모 인구의 격변적인 이동, 안민으로 넘쳐나는 수용소, 국가간의 전쟁과 내전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사람을 뒤섞어 놓았다. 우리는 실로 인류가 뒤죽박죽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이 가르침을 베푸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때 그분과 함께 있었다. 예수님은 그녀의 삶의 중심이 되셨다. 그러나 그녀는 그분이 잔인하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슬픔과 고통을 주체할 수 없어 무슨 일이든 하고 싶었다.

그녀는 그분이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았을 때 군중을 헤치고 나와, 땀과 피로 얼룩진 그분의 얼굴을 베일로 덮었다. 예수님은 그 베일에 얼굴 형상을 남기심으로써 이 사랑과 애통의 행위에 반응하셨다. 그것은 바로 제자리를 잃고 뒤죽박죽 된 인류의 얼굴이었다.

예수님의 얼굴은 이별, 분리, 강제 이주 등으로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의 얼굴이다. 베로니카는 슬픔의 여인이다. 그 슬픔은 심한 고통으로 마음에 사무친 슬픔이다. 그것은 세상 전역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나라, 민족, 사회의 여성들이 겪고 있는 슬픔이다. "왜 그들은 우리 아이와 남편과 친구를 데려가는 겁니까? 이 고통스런 질문은 우리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울려나는 절규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도 그 외침을 들을 수 있을까? 내 방의 벽에는 가족, 친구들의 사진과 예수님, 마리아, 성인들의 그림이 빙 둘러서 걸려있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는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 그것은 부재(absence)로 인한 아픔이다. 내가 함께하기를 가장 원하는 한 사람이 나와 함께 있지 않다. 또한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는 서로의 가장 깊은 필요에 다가갈 수 없을 것이다.

베로니카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기도 하다. 나는 사귐, 소속감, 친밀감을 갈망한다. 그러나 나는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부재, 단절, 고립을 경험한다. 마치 어떤 칼 하나가 모든 사람을 꿰찌르고 모든 친밀함에 고통을 더하는 것 같다.

내 방에 걸려 있는 사진과 그림들은 사귐을 향한 나의 갈망을 보여준다. 그러나 넘치는 사랑으로 그것들을 바라볼 때 내 마음에는 엄청난 아픔이 밀려온다. "나는 왜 그와 이야기할 수 없는가? 그녀는 왜 내게 편지를 쓰지 않는가? 그들은 왜 우리가 화해하기 전에 죽었는가? 왜 우리는 서로를 편안하게 느낄 수 없는가?" 그리고 나는 예수님의 그림 앞에서 촛불을 켜고 그분의 눈을 통해 영원의 세계를 응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 언제, 도대체 언제 오셔서 내 마음의 깊은 갈증을 풀어 주시렵니까?" 그리스도의 얼굴과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얼굴이 새겨진 베로니카의 베일을 볼 때마다 사귐을 향한 갈증이 생겨난다... 그리고 늙어 가면서 그 고통은 깊어진다.

진정한 사귐을 얻기 위해서는 내 생명을 잃어버려야 한다. 내 그림들을 내려놓고 진짜 사람을 만나야 하며, 감상적인 기억을 버리고 나의 상상을 초월한 새로운 사귐이 있을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예수님의 삶과, 감옥과 난민 수용소와 고문실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어떻게 새로운 삶을 믿을 수 있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바라보시고 내 마음에 그분의 얼굴 형상을 찍어 주신다. 나는 항상 찾고 기다리고 소망할 것이다. 고통당하신 그분의 얼굴은 나를 절망시키는 것이 아니다. 나의 슬픔은 나의 갈망을 보여 주고, 나의 외로움은 나의 갈증을 보여 준다. 우리는 서로 만날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사랑이, 바로 고통이 머무를 수 없는 삶의 씨앗임을.

제7장 예수님이 두 번째로 쓰러지시다
이 가난한 브라질 농부는 완전히 탈진 상태다. 그는 가족들이 어느 정도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매시간, 매일, 매주, 매달 자기 땅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몇 년을 힘들게 일하고 난 후에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그가 농사를 짓는 토양은 이미 황폐해졌기 때문에 수확량이 형편없다. 그는 땅의 이용 가치를 높이기 위해 현대적인 농업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경쟁이 안 된다.

생산물을 팔아 번 돈을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아내와 자식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진 빚조차 갚을 길이 없다. 그리고 해를 거듭할수록 상황은 점점 나빠져만 간다. 그는 자신의 작은 농장을 떠나 수백만 명의 가난한 사람이 사는 대도시 주변의 빈민굴로 가야 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빚을 다 갚고, 아이들 교육도 시키고, 좀더 비옥한 땅을 조금이라도 살 만한 돈을 벌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 꿈은 모두 산산조각이 났다. 그와 그의 말은 점점 늙어 가고 지쳐 있다. 고된 노동으로 인해 온몸 구석구석 안 아픈 곳이 없다.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을 감싼 그에게는 공허한 미래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너무나 어두워졌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데 계속 살아야 할지도 의문이다. 그는 자신을 실패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소망했던 남편, 아버지, 친구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절망에 빠진 농부는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경제의 힘에 희생당한 수백만의 사람 중 하나일 뿐이다. 그들은 이제 부모와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생업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한 농부의 삶을 가난과 두려움의 삶으로 만들어 버리고 가난과 두려움의 삶을 불행과 빈곤의 삶으로 만들어 버린, 국가적이거나 국제적인 동향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혹은 전혀 없다.

예수님이 두 번째로 쓰러지신 것은 이제 지고 가는 십자가가 무거워서가 아니라, 전신이 완전 탈진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분은 에너지를 전부 소모하셨다. 고향에서의 수년 간의 노동, 설교하신 시간, 큰 무리가 따르는 가운데 제자들과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신 시간은 모두 육체적으로 무거운 짐이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회개하라는 자신의 부르심에 대한 저항이 커졌다.

그분은 생명의 위협,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변절, 유다의 배반, 베드로의 부인, 채찍질, 조롱, 헤롯과 빌라도의 철저한 이해 부족, 적대적인 무리의 외침 같은 저항을 견뎌내셔야 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지기에는 너무 많은 짐이다. 그래서 그분은 비틀거리다 넘어지셨다.

사랑과 용서가 있는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그분의 꿈은 어디로 갔는가?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그 비전을 공유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그분은 완전히 혼자다. 그분은 요단강과 변화산에서 그분에게 말씀하셨던 그 목소리를 왜 더 이상 들을 수 없는지 의아해하신다. 그분이 실수를 하신 것인가, 아니면 그분은 자기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권세들의 희생자였는가?

예수님은 우리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가고 싶어하지 않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파괴적인 절망에 빠져들고 싶은 순간을 너무나 잘 아신다. 가난에 찌든 브라질 곳곳뿐 아니라 다른 개발 도상국에서도 사람들이 그런 감정으로 괴로워한다. 부유하고 성공한 사람들도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만큼 절망에 빠지려는 유혹을 받는다.

나 자신의 고투를 보건대, 그 브라질 농부의 영혼이 무엇을 느끼는지 알 것 같다. 나 역시, 경제적으로 내 미래가 안전해 보일 때조차도 갑자기 죄책감과 수치심, 두려움과 절망감 같은 혼란스런 감정에 빠져든다. 그리고 오랫동안 열심히 일한 사람의 눈을 통해 나를 바라보면, 나는 종종 똑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그것은 "내 생애는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우리 마음속에서 깊은 피로감이 생겨나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을 것처럼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이 엄청난 실패처럼 보인다. 우리의 노력은 전부 아무것도 아닌 듯하다. 꿈은 산산조각 나고 희망은 꺾이고 포부는 갈가리 찢긴다. 침체가 찾아오고 이제 무엇이 어떻게 되든 나에게는 상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예수님은 쓰러지셨을 때 우리와 함께 그런 고통을 겪으셨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에게 그분의 쓰러짐과 우리의 쓰러짐은 모두 십자가의 길을 가는 과정임을 믿으라고 하신다. 우리가 쓰러질 때 할 수 있는 일은, 예수님이 쓰러지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쓰러지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기억은 소망이 있다는 첫 번째 예감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소망은 브라질 농부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묶어 줄 것이며, 우리에게 더 공정하고 사랑 많은 사회로 가는 방향을 보여 줄 것이다.

  • 역자 김명희
  • 저자 헨리 나우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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