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떡방 이야기 - 정정섭 [출판사:두란노]
복떡방 이야기 - 정정섭
주님,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저의 눈물이 고이길 원합니다.
‘복음’과 ‘떡’으로 세상을 살리는 빛과 소금들의 이야기
이 책은
주님,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저의 눈물이 고이길 원합니다
‘복음’과 ‘떡’을 들고 가장 낮은 곳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
그들의 사랑과 열정에 도전 받고, 인내와 수고에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마음이 가 있는 그곳으로
‘오늘 하나님의 눈은 어디를 보고 계실까? 어디를 바라보며 마음 아파하실까?’ 아직도 소돔과 고모라를 포기하지 못하고 지금보다 더 안락한 삶과 성공을 꿈꾸며 욕망에 찬 기도를 드리는 사람일까? 결단코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관심은 가장 낮은 데 있다.
아직도 세상에는 1분이면 34명, 1년이면 1,800명씩 굶주려 죽어가고 있다. 하루에 단돈 100원이 없어 삶과의 총성 없는 전쟁을 치루다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다. 끼니 걱정하지 않고, 공부할 교실이 있고, 비가 와도 새지 않는 지붕이 있다면 우리는 지구촌에서 상위 25퍼센트에 속하는 부유층인 셈이다. 그런데 뭐가 부족하다고 불평하고 투정하며 원망하는 식의 기도를 내뱉을 수 있겠는가?
오늘도 하나님의 눈은 헐벗고, 굶주리고, 신음하는 곳을 바라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저들을 먹이라. 너희에게 준 복음과 떡을 저들에게도 나누어 주어라.”
이 책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복음과 떡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 빛과 소금이 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돈이 많거나 큰 권력을 가진 자들이 아니었다. 다만 ‘나’가 아닌 ‘남’을 돌아보는 주님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었다.
복떡방 20년
복떡방은 ‘복음’과 ‘떡’을 실어나는 곳, 즉 기아대책을 일컫는 말이다. 기아대책은 ‘떡’과 함께 ‘복음’이 가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영혼과 육신을 분리하면 죽음이 찾아오듯, 교회가 복음만 전한다는 생각으로 떡의 문제를 외면하면 세상을 향한 영향력을 잃기 때문이다. 또한 떡만 준다는 생각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을 때 그들 삶의 진정한 변화와 풍요는 찾아오지 않는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관념이 아니라 배고픔을 채워 주는 실제적인 떡이며, 삶의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이다.
남의 사무실 한 켠의 조그마한 책상에서 전화 한 대로 시작한 기아대책 사역은 이제 전 세계 60여 개국을 섬길 뿐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국내의 이웃들, 또한 북쪽에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까지 그 손길이 닿고 있다. 이는 현재 20만여 명에 달하는 개인과 교회, 기업체의 후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요, 복이라는 말밖에 다른 할말이 없다. 스태프 한 사람과 함께 시작했지만 이제는 지구촌에서 3천 명이 훨씬 넘는 사람이 한국기아대책이라는 이름으로 동역하고 있다. 14명의 이사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2천여 명의 이사가 함께 섬기고 있다. 첫 회 1억 8천만 원을 모금해 15만 달러를 7개국에 보내 준 것이 출발점이었지만, 이십 년이 지난 지금은 1천 억이 넘는 예산을 세워 놓고 모든 기아대책 가족들이 기도하며 모금에 정진하고 있다. 국내에 변변한 시설 하나 없었지만 지금은 2백여 개에 달하는 사회복지시설을 맡은 청지기가 된 것도 주님의 특별한 은혜이요, 복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열며
나누고 섬기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
1989년 나는 이십 년 넘게 섬기던 전경련 전무이사직을 사임했다. 전도폭발 훈련자로 일본에 다녀온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일본 선교사로 나가려는 소망이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일을 상의하려고 대학 시절부터 멘토가 되어 주신 윤남중 목사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목사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당신이 선교사로 나가면 한 사람 몫밖에 못 해요. 당신은 선교사가 되기보다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한국기아대책을 세울 것을 말씀하셨다. 너무나 뜻밖의 말씀이셨고, 내가 감히 생각지도 못한 길이었다. 그런데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번뜩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이 일을 하라고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신 건 아닐까? 가장 낮은 자들을 섬기게 하시려고….’
나는 굶주림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지금도 기억한다. 가죽 장화를 신은 일본 순경들이 칼을 차고 저벅저벅 들어오면 마을 사람들은 애어른 할 것 없이 도망부터 쳤다. 죄 지은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저기 순사가 온다!”라고 하면 아이들은 울다가도 뚝 그쳤다. 당시 일본 순사는 호랑이보다도 무서운 존재였다. 놋그릇, 놋수저, 솥단지 등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두 거둬 갔고, 먹을 양식까지 죄다 공출이라는 형식으로 빼앗아 갔다. 삼십육 년의 식민 통치 기간에 일본은 우리를 그렇게 압박하고 착취했다.
그 시절 우리는 산에 가서 칡뿌리를 캐어 먹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었다. 봄이 되면 진달래꽃을 따다 먹고, 잔디 뿌리를 씹어 먹었다. 보리쌀 한 움큼에 물만 한가득 넣어 끓인 멀국을 서로 빨리 먹으려고 달려들었던 기억도 잊히지 않는다. 아홉 남매의 막내였기 때문에 더 그랬을까. 나는 지금도 밥 먹는 속도가 대단히 빠르다. 시간이 지났다고 배고픈 설움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봄이 되면 마을 청년들은 누렇게 뜨고 퉁퉁 부은 동네 사람의 시체를 지게에 져다가 야산에 묻곤 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은 이들이었다.
나는 친구 아버지가 방 안에서 보름 동안 굶다가 돌아가신 기가 막힌 일을 두 눈으로 직접 봤다. 친구 아버지가 몰래 남의 밭에 가서 고구마를 캐어 식구들을 먹인 것을, 그 집의 지게에 황토와 고구마 줄기가 묻어 있는 걸 보고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체면 때문에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고 나서는 ‘밀풀떼’라고도 하는, 통밀을 갈아 끓인 밀풀죽을 먹었다. 그런데 그조차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 큰 양푼에 퍼다 놓으면 이삼십 명의 사람들이 달려들어 서로 먼저 먹으려고 했다. 1970년대 초까지도 보릿고개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뭐니 뭐니 해도 배고픈 설움이 제일 크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라는 어른들의 말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혁명공약 1조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굶주림의 기억과 함께 내 머릿속에는 배고프고 아픈 이들을 살펴 주셨던 아버님과 어머님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보릿고개를 지날 때마다 늘 어려웠던 우리 집 형편은 형님과 누님이 출가한 후부터 어느 정도 나아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가족들이 먹고 남는 식량이 생긴 것이다. 그러면 어머님은 주저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에게 그 쌀을 갖다 주셨다. 그것도 쌀자루를 독이 깊은 항아리 속에 숨긴 채 머리에 이고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 가난한 이웃집으로 향하곤 하셨다. 쌀을 받아먹는 이웃집의 자존심을 세워 주기 위해서였다.
아버님에 대한 기억도 떠오른다. 6·25전쟁 말미에 후퇴하던 인민군 한 명이 부상을 입은 채 우리 집 화장실에 몰래 들러 일을 보다가 그만 뒷간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인민군에게 처절한 고통을 당해 본 경험이 있었다. 우리 집 역시 인민군에게 식량을 빼앗겨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인민군이라면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아니, 보면 달려들어 죽일 기세였다. 그런 이유로 마을의 공산당원이었던 사람조차 부상당한 인민군을 외면했다. 하지만 아버님은 그 상황에서도 화장실 분뇨통에 빠진 인민군을 손수 꺼내 우물로 업고 가서 깨끗이 씻기고 먹을 것과 당신의 옷까지 입혀 보내셨다.
가난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결코 외면하는 법이 없던 아버님과 어머님의 모습이 왜 갑자기 목사님 앞에서 떠올랐을까? 내게 그런 부모님을 보내 주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결단의 말이 터져 나왔다.
“하겠습니다!”
얼마 후 나는 일본기아대책 이사장인 호리우치 목사님을 만났다. 목사님은 일본 사람들에 대해 갖고 있던 나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어 주었다. 그는 정말 한국 사람 같은 일본인이었다. 그런 목사님이 우리에게 종자돈 5만 달러를 건네 주었다. 그 돈은 한국기아대책의 시작이 되었다.
또한 호리우치 목사님은 내게 국제기아대책기구 회장이었던 일본계 미국인 야마모리 박사님도 소개해 주었는데, 그분은 만남의 자리에서 자신의 저서 한 권을 건네 주었다. 나는 그 책을 세 번이나 읽으면서 무척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굶주림 때문에 1분마다 34명이 죽어 간다고 했다. 일 년이면 1,800만 명이 죽어 간다는 얘기였다. 그들은 배뿐 아니라 영혼도 굶주린 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그냥 죽어 가고 있었다. 그 순간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선교사라고 해도 선교 활동을 할 수 없고, 선교사라고 하면 비자도 내 주지 않는 북위 10~40도 사이에 있는 나라인 북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이슬람권과 몽고, 북한,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 사회주의 국가, 그리고 인도 등 힌두 국가, 태국 등 불교 국가가 21세기의 땅끝이라고 했다. 전 세계 굶주린 사람들의 84퍼센트가 이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지역 사람들의 97퍼센트가 복음을 들어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들어 볼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
야마모리 박사는 이제 이 지역에 들어가되, 전통적인 기독교 선교 방법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한 손에는 떡을, 다른 손에는 복음을 들고 들어가는 하나님의 새로운 전권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몸과 영혼의 굶주림을 함께 채워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온몸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거다.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 사람들의 육체적 굶주림뿐만 아니라 영적인 굶주림을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다.’
나는 이 일에 헌신하기로 결단했다. 그 뒤로 이십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아대책을 향한 내 마음과 태도도 달라졌다. 처음엔 그저 헌신하려는 마음으로 시작한 기아대책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 자신이 기아대책을 위해 헌신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나 같은 사람도 들어 쓰시어 이 귀한 일들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머리 숙여 감사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말이 없다. 나는 헌신한 게 아니라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지난 이십 년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복된 현장에서 목격자로 사는 복을 누렸다. 나누고 섬기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사실을 들었고 보았고 깨달았다. 또한 나는 복의 통로로 사는 많은 사람을 만나는 복을 누렸다. 이것은 기아대책을 시작하기 전에도, 시작한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복 중의 복이다.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그 현장의 이야기들을 목격자로서 증언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섬기는 사람, 복의 통로가 되는 사람을 통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지금 그런 사람들을 찾고 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한 사람! 하나님께선 그 한 사람을 통해 대한민국을 복 주시길 원한다. 지구촌에 큰 복을 주시길 원한다. 그 한 사람이 되길 원하는 당신에게,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당신에게 기아대책의 이야기인 이 책을 바친다.
또한 ‘떡과 복음 사역’을 위해 그간 기도와 후원을 아끼지 않은 한국 교회와 20만 명의 후원자, 2천여 명의 이사(理事)와 3천 5백여 명의 사역자와 간사, 배후의 기도 봉사자들에게 지면을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분들의 헌신과 수고와 기도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 오늘의 기아대책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진정한 저자는 바로 성령님이시며, 성령님의 쓰임을 받고 있는 그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