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생활의 향기 - 모든 종교인들이 사모해야 할 성화 완덕의 미 - 엄두섭 [출판사:은성]
수도생활의 향기 - 모든 종교인들이 사모해야 할 성화 완덕의 미
수도생활의 향기 - 모든 종교인들이 사모해야 할 성화 완덕의 미
모든 종교인들이 사모해야 할 성화, 완덕의 미(美)
이 책은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찾아볼 수 없는 대작이다.
수도원은 교회가 핍박받을 때 지켜 주고 세속에 빠질 때 건져 주고 이단 사교가 일어날 때 바른 신앙을 지켜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세 교회가 쇠약해지고 암흑해졌을 때 베네딕, 베르나르, 프란시스 등의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 교회를 깨우고 정화시키고 영적 물줄기를 대어 주었다. 교회는 끊임없이 이런 대산맥 같은 성인들의 영향력 속에서 자라 왔다.
새로운 생애를 낳으려면 해산의 고통과 단장(斷腸)의 아픔이 따른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새 생애가 그렇게 값진 만큼 아픔이 따른다.
나는 이 글을 써 가면서 기도한다. 한 자 한 자 써 가며 속으로는 끊임없이 기도한다. “이 글이 방황하는 중생들 마음에 바른 삶에 대한 깨달음을 주게 하옵소서. 보잘것없는 글이라도 이것으로 죄 많은 나의 참회의 표현이 되게 하옵소서. 유언이 되게 하옵소서….”
이 책을 집필하기까지 방대한 연구와 지식이 필요했다. 우선 세계 교회사에 정통해야 하며, 동양의 종교사를 알아야 했으며, 나아가 우리나라의 종교와 민속신앙을 이해해야 했다. 국내외 각처에 있는 수도원과 성인들의 유적을 답지답사하며 한 줄 한 줄 글을 만들었다.
재간행에 즈음하여
이번에 『수도생활의 향기』를 다시 간행하는 일에 있어서 은성출판사의 수고와 노력을 치하합니다.
이 책은 30년 전 내 나이 60세 때 첫 출판한 것으로, 보다 젊은 나이 30-40대에 썼더라면 내 일생이 멋있는 것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첫 출판 후 얼마 지나 나는 한국교회 첫 수도원인 은성수도원을 창립했습니다. 그 시절은 사람들이 수도라는 말을 거의 이단시하고 무관심하던 때였습니다. 다만 나 자신 교회 목회를 하면서 여러 가지 부조리에 거부감을 느꼈고, 그로 인해 교회사에 큰 영향을 끼친 성자들과 수도원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면서 이 책을 쓴 것입니다. 이 책이 출판된 후 개신교에도 몇 곳에 수도원이 생겨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오늘날 “유럽의 교회들은 죽었다”는 평을 많이 듣지만 유럽 각지의 수도원들은 건재해 있고, 기독교의 가장 순수한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존경하고 사모하는 성인들인 어거스틴, 프란시스코, 베네딕도, 테레사 등은 모두 수도원 출신들입니다.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는 모두 교회와 수도원이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으며, 수도원은 영적 수원지가 되어 교회에 절대적인 영향과 감화를 끼치면서 공존하며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 나이 구순(九旬)이나 아직도 가슴은 청년 같은 정열로 수도생활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저술한 후 나는 이탈리아에 가서 프란시스코 수도원과 유적지를 모조리 답사하면서 큰 감격에 잠겼었습니다. 한국과 중국 몇 곳의 수도원 창립에 가담했고, 수녀들 허원식을 주제넘게 주례하기도 했습니다.
수도생활은 밭에 감추어진 보화같이 귀한 것이라 하는데,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 가슴에도 수도생활의 향기와 갈망이 일어나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아울러 한국 개신교회에도 많은 건실한 수도원들이 생기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그대는 香
동방의 순결한 貞女
님의 향로에 담겨져
소리 없이 타오르는 그 향연
위로 九天에, 옆으로 千万리
그윽한 향취 億劫에 사무쳐라.
그대는 불나비
빛! 불빛만 보면 狂喜에 차
두 날개 쭉 뻗고 마지막 円舞
이윽고 불꽃을 안고 누워
님과 함께 타다 죽는 정열의 제물.
그대는 새, 밤새 우는 새
울고 또 울고 목에선 피를 토해
두견 꽃잎 붉게 물들이는 새
불러 불러 멎을 줄 모르는
님 상사의 애끓는 넋이어라.
그대는 鍾
이끼 푸른 옛 사원의 종각
딩덩… 딩덩… 천년의 변함없는 울림
앞뜰엔 꽃도 피고 서리도 내리고
뒷산에 먹구름도 일고 단풍도 타고
衆生의 맘 따라 한없이 울려 가네.
제1부 명상의 명제
1) 마음이 무엇입니까?
강의 시간에 한 학생이 갑자기 “선생님, 마음이란 게 뭡니까?”라고 물었다. 질문치고는 좀 어리석은 듯한 질문이었다.
“마음이 마음이지 뭐야!” 해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러나 가장 아는 듯 사실은 가장 모르는 것, 가장 알기 힘든 것이 마음이란 것이다. 내게 가장 가까운 것이라기보다 마음이 곧 나요, 내가 곧 마음인데도 “마음이 뭐예요?” 물으면 갑자기 대답할 수가 없다.
마음은 사람 안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요, 사랑․기쁨․미움 같은 정적(情的), 지적(知的)요소를 포함하고, 도덕적 판단을 하는 지․정․의(知情意)의 밑바탕이 되는 통일적 판단의식이다.
…예수께서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5)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 이치를 말한다. 잠재의식이 그대로 “마음”은 아니다. 말하자면 잠재의식은 마음이 다룰 소재(素材)이다.
잠언 4장 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놀부”마음이라 하는 이들이 있다. 다른 사람은 오장육부이지만 놀부는 오장칠부였다. 술 잘 먹고 욕 잘하고 애태우고 쌈 잘하고 초상난 데 춤추고 불난 집에 부채질하고 장에 가면 억지 흥정. 우는 아이 똥 먹이기, 늙은 영감 덜미 잡기, 아이 밴 여자 배 차기, 우물 밑에 똥 누기, 애호박에 침 주기, 앓는 눈에 고춧가루 넣기, 이 앓는 놈 뺨치기….
외국 사람들에게 비친 한국인의 상은 아주 나쁘다. 영국, 미국 영화에는 한국인을 살인광, 협잡꾼, 무지막지한 폭한으로 등장시킨다고 한다. 한국인의 마음이 세계 사람들에게 이렇게 나쁘게 비쳤으니 이 누구의 허물인가. 한국의 소도 외국 소보다 사납고 지랄질이 심하다고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종교인들의 세계 속에서만 굴러 지내왔는데, 일반 사회인들만이 아니라 불교, 기독교 종교인들의 마음보들도 그렇게 나쁠 수 없다.
제2부 수도의 목표
수도의 최고 목표: 성화(聖化)
유명한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 4. 15~1519. 5. 2)는 어느 때 예수님의 화상을 그리려고 그 모델을 찾아다녔다. 어느 곳에서 매우 아름다운 청년 하나를 만났다. 꿈을 보는 듯 시원한 그의 눈동자와 아름다운 용모는 예수님의 모델 되기에 족했다. 화가는 그를 모델로 삼아 좋은 예수님 화상을 그렸다.
그 후 몇 해 지나서 화가는 이번엔 마귀의 얼굴을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그 모델 될 사람을 찾아 프랑스 파리 뒷골목 여기저기로 찾아다녔다. 어느 날 허술한 슬럼가 어느 다리 밑에 쭈그리고 앉은 한 사람을 만났다. 화가의 눈에 그의 험상궂은 용모는 어김없이 마귀의 인상을 주었다. 화가는 기뻐 그에게 다가가서 자기 그림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추하고 험상궂은 얼굴을 들어 화가를 보며 이상한 눈초리로 “이상한데요. 몇 해 전 어떤 화가가 나를 모델로 예수 그리스도를 그린 적이 있는데요?”라고 했다. 화가는 깜짝 놀랐다. 이 험상궂은 청년이 바로 몇 해 전 자기가 예수님 얼굴을 그리던 모델이었다. 그동안 그는 술주정뱅이가 되고 타락해서 예수에게서 마귀로 전락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사람이란 것은 천사와 악마 두 사이로 왔다갔다하는 시계추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신적(神的)인 것과 악마적인 것은 동일한 구성요소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의 단순한 전향(轉向)이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기에 넉넉하다. 하나님은 완전히 거룩하시고 하나님의 세계도 완전히 거룩한 세계요,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요구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장 크고 중대한 섭리와 경륜은 인간의 성화(聖化)다. 범죄하고 타락된 인간을 사죄해 주는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의 역사다. 그것이 교리적으로는 중생(重生), 회개(悔改), 의인(義認), 구원(信仰), 성화(聖化), 견진(堅振)의 과정이다.
신자는 거룩한 생활과 성화 은총을 사모하고 최고의 염원을 여기 두어야 한다. 높은 완덕과 성인이 되려는 큰 소망을 주제넘은 자존심, 허영심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
…중국의 석학 우징숑(吳經熊) 박사는 “우리는 변호사, 판사, 학자, 공장(工匠)이 되려고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인이 되려고 탄생하였으며, 인간 존재마다 그 안에는 심고 길러서 익을 준비를 갖춘 성성(聖性)의 씨앗이 들어 있다. 학문이나 그 밖의 인간적 노력 성취(成就)를 멸시하지는 않지만 일체의 사물은 사랑의 불을 때는 염료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누구나 자신의 문제를 잊어버리고 밤낮 밖의 일, 남의 일에만 정신 팔려 돌아다닌다. 그런 인생은 실패하고 만다. 종국에는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우선 사람 구실, 사람다운 사람, 종교인다운 종교인,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천당 가는 것이 급하지 않다. 성화되는 일이 더 중하다. 구더기가 구더기를 탈피하지 못하는 한 똥물 속에서 못 벗어난다. 구더기를 탈피하고 날개가 돋치면 그때는 더 이상 똥물 속에 살지 않는다.
예수를 믿고 기적 가운데 가장 큰 기적은 인격이 변화되어 성화하는 기적이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이 거룩한 사람, 거룩한 생활, 성인을 갈망하라. 기독교인의 생활이라든가 기독교 윤리란 곧 성화론(聖化論)이다.
제3부 정진․이탈 수업
정진
토마스 아 켐피스는 말하기를 “성인들은 누구나 다 많은 고난과 시련 중에 지냈으며 그러는 가운데서 진보하였다. 시련을 참고 견딜 줄 모르는 사람은 버림을 받아 타락했다. 자기를 엄격히 다스려 육신을 영혼에게 완전히 복종케 하는 자는 참을성이 많은 사람으로서 세상이 그에게 유익한 연옥이 된다. 장래의 보속(補贖) 거리를 남겨두는 것보다는 지금 죄를 보속하고 악습을 없이하는 것이 낫다. … 괴로움을 당하면 그리스도를 닮고 성인들과 같아진다”고 했다.
바울은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전 9:24-27)라고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의 정성 다하고 힘을 다해 걷자(步步是道場). 걸음걸음 깨끗이 살자(步步起淸風).
단 사흘 동안 수도한 마음이라도 천 년의 보배가 되고, 백 년 동안 탐한 물건들은 하루아침에 타끌이 된다(三日修心千載寶 百年貪物一朝廟塵). 그러니 수도 정진생활을 하자. 이 세상에서 수도 정신생활보다 더 아름다운 생활은 있을 수 없고 더 사모할 생활도 있을 수 없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아 2:2).
수도자의 상징은 백합화이다. 백합화는 높은 향기와 청초하고 순결하고 고상한 미를 지니고 있는 꽃이다. 고난과 시련의 바람이 불 때 백합화는 가시에 찔려 더욱 향기를 풍기는 것이고, 그 순결은 가시밭 속에 둘려 있음으로 해서만 지켜 내는 것이다. 고난, 시련, 정진이 없으면 향기도 순결도 드러내지 못한다. 괴로움을 겪으면 그리스도를 닮고 성인들과 같아진다. 인생이 잠깐이요 수명은 정해져 있으며, 이승에서의 행위 하나하나는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들인데 일 분 일 초인들 게을리 할 것인가! 어찌 한가히 지내랴! 정진! 정진! 일 분도 쉬지 말자. 오락은 필요 없다. 휴식도 필요 없다. “나의 종교는 오락이 아니다”(賀川風彦). 교회사에서 귀족적인 기독교는 모두 망했다.
인생에겐 이승에서 쉬는 시간이 없다. 그렇게 쉬기를 조급히 굴지 말자. 무덤에 가서는 두 다리 쭉 펴고 누워 영원히 쉴 수 있다. 게으른 여우는 닭을 잡지 못한다. 늘 쓰는 쇳대라야 번쩍번쩍 빛난다. 모든 경우 모든 일에 목숨을 걸고 해야 한다. 정진한 대로 보수가 있게 마련이다.
제4부 수도생활
무위
노자(老子)나 도가(道家)의 무위사상도 수도생활의 한 방법이 된다. 기독교 전통에서 이것을 거룩한 무관심(聖無關心)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수녀들이 세상 일뿐만 아니라 수도원 안의 일에 대해서도 관심 가지는 것을 금했다. 물론 기독교 수도자들의 성무관심이란 것이 도가의 무위 사상과 내용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수도자들은 정진(精進)하면서 무관심하는 것이다. 정진하는 목표만 바라보며 그 밖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일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수도사라는 말 “모나코스”는 혼자 사는 자(獨住者)라는 뜻이요, “아나코레테스”는 숨어 사는 자(隱修士)라는 뜻이요, ‘에레모스’는 황야에서 혼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세 가지 말이 의미하는 대로 수도사는 가족과 고향, 친척, 시민의 의무도 다 버리고 사막이나 산중 암굴에 숨어 고독하게 살며 엄격한 고행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과만 합일하여 살려고 애쓰는 이들이다.
절대 고독과 침묵이 곧 수도이다. 수도자들은 고독을 예찬하기를 “오오, 은혜로운 독거(獨居)여! 오오, 고독의 축복이여! 오오, 행복한 고독! 오오, 유일의 행복!”(O beata solitudo: O Sola beatiludo) 하고 노래했다.
제5부 수도원사
수도사의 어원
히랍어 “모나코스”(μοναχὁι)를 라틴어가 그대로 받아 monachus로 쓰고 영어의 monk, 독일어 mönk, 프랑스어 moine 등은 모두 라틴어에서 나온 말이다. 히랍어 “모나코스”는 “혼자 사는 자”(獨住人), “고독인”을 뜻하는 말이다. 혹은 “은수자”(隱修士)를 가리킨다. 헬라어 “모노스”(μογοι)는 홀로(alone)에서 나온 말이다.
“모나코스”와 비슷한 말로 “아나코레테스”(άναχωρητήι)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도 라틴어 anachoreta로 쓰여지고 영어 anchorite, 독일어 anachoret, 프랑스어 anachorete는 거기서 유래한다. 그 뜻은 “숨어 있는 자”(隱者), “은수사”(隱修士)로 번역되는 말이다.
또 한 가지 말이 있는데 “에레모스”(ἔρημοι)가 라틴어 eremita, 영어와 불어의 eremite, 독일어 eremit로 전승된다. 그 뜻은 “거친 광야에 혼자 사는 자”이다.
수도사라는 것은 이 세 가지 말이 뜻하는 그대로 혼자 사는 자, 숨어사는 자, 거친 광야에 사는 자들이다. 그들은 글자 그대로 고향과 가족, 시민의 의무도 버리고 속세를 탈출하여 산 속에 은둔한 사람들로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이집트 사막이나 시내 반도의 산악 속 혹은 시리아 거친 들이나 카파도키아 동굴 속에 몸을 숨기고 철저한 금욕과 고행을 하면서 생의 고뇌를 이겨 가며 명상과 기도의 경건 속에서 신과의 합일을 염원하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이와 같이 수도사들은 혼자 있든지 혹은 여럿이 모여 있든지 언제나 침묵하고 고독했다. 그들은 세속이나 가족들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 죽은 자로 알고 뼈에 사무치는 고독도 감격하며 노래했다.
수도원과 수도원주의 공식적인 기록으로 보면 기독교 수도원의 시작은 안토니(St. Anthony)로부터 시작되었다. 전통적으로 “수도사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안토니(251-356)는 중부 이집트의 기독교인 농부의 아들이었다. 당시의 알렉산드리아 주교였던 아타나시우스가 그의 『전기』를 기록했기 때문에 교회의 공식적인 수도원이 시작되었지만, 실제로안토니 보다 먼저 독거 수도한 인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안토니가 처음 수도생활을 시작했던 피스필(Pispir) 근처에 독수도자로부터 지도를 받았으며, 말년에 홍해 근처 콜짐산 동굴에 머물 때 이 산의 홍해편에 이미 폴이라는 독수도자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파와 이단논쟁을 벌일 때, 안토니의 생애를 실제 예를 들기 위해 『안토니의 생애』를 집필하고 널리 알림으로써 기독교회사 안으로 수도원의 운동이 공식적으로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안토니는 20대 초에 예배에 참석했을 때 독서자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는 말씀을 봉독하는 것을 듣고,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마을 외곽에 있는 사막에서 살면서 은둔자들과 거룩한 사람들의 지도를 받으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