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꾼다 - 하용조 [출판사:두란노]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꾼다 - 하용조
사도행전의 바로 그 교회는 오늘날에도 존재할 수 있는가!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의 30년 목회 결정판!
성경적 교회론과 목회철학을 말한다!
건물을 튼튼하게 지으려면 좋은 설계도가 필요하듯이, 건강한 교회가 세워지려면 건강한 교회론과 목회철학이 있어야 한다. 교회론과 목회철학은 몸의 척추에 해당한다. 시스템이다. 뼈대이다. 그래서 교회론과 목회철학이 흔들리면 다 흔들린다.
먼저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것이 먼저 정리되어야 한다. 어떤 교파든지 어떤 교회든지 교회론의 기준은 예수님의 교회론이다. 목회철학은 교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교회론은 어느 교회든지 동일하다.
예수님의 교회가 현실로 이루어진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바로 사도행전의 교회이다. 온누리교회 목회철학의 기준은 사도행전의 교회론이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실수가 많은 교회이다. 불완전한 교회이다. 가끔 싸우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한다. 완전한 교회가 아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교회는 로마를 뒤엎었다. 2000년 동안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사도행전 교회는 건물도 제도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성령님이 계셨다. 현대 교회는 건물도 있고, 제도도 있고, 사람도 있다. 다 있는데 진짜 중요한 게 없다. 예수님의 교회론, 사도행전적 목회철학이 없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 적용된다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가 사도행전 교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것이 바로 온누리교회 교회론과 목회철학의 기준이다!
우리가 꿈꾸고 우리가 바라고 우리가 이루어 가야 하는
사도행전적 교회의 열 가지 특징!
1_ 사도행전적 교회는 성령 사역하는 교회이다.
2_ 사도행전적 교회는 서로 통용해서 예수 공동체를 이루는 교회이다.
3_ 사도행전적 교회는 기적이 일어나는 교회이다.
4_ 사도행전적 교회는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교회이다.
5_ 사도행전적 교회는 재물을 나누는 교회이다.
6_ 사도행전적 교회는 거룩하고 성결한 교회이다.
7_ 사도행전적 교회는 영적 리더를 세우는 교회이다.
8_ 사도행전적 교회는 이방인을 품는 교회이다.
9_ 사도행전적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이다.
10_ 사도행전적 교회는 사도행전 29장을 계속 써 가는 교회이다.
타깃>>>
사도행전적 교회를 이어 가는 바로 그 교회를 꿈꾸는 목회자들에게
교회의 부흥을 소망하는 젊은 목회자들에게
사도행전 29장을 써 나가는 교회가 되길 원하는 성도들에게
메시지>>>
교회는 벌집이나 개미집과 같아서 매트릭스를 해야 한다. 네트워크를 짜야 한다. 넝쿨처럼 뻗어 가야만 한다. 교회는 재생산하는 공간이다. 끝없이 자라 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연합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어 살아 있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
주님이 원하는, 주님이 바라는, 사도행전적 교회… 이것이 내가 그동안 생각한 주제이다
나는 교회를 생각하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해도 기분이 좋다.
교회가 살아야 세상이 산다.
교회는 세상의 키다.
교회는 세상의 방향이다.
교회는 세상의 정신이다.
교회가 타락하면 세상은 타락한다.
세상이 죽은 이유는 교회가 죽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정치와 교육의 해답이다.
교회는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며 유일한 대안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제도가 아니다. 교파가 아니다. 방법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 껍데기다.
교회론과 목회철학이 잘 세워지면 예배가 살아난다
교회론과 목회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다. 예배는 흥분이다. 감동이다. 눈물이다. 심장이 뛰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성령님의 능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귀신이 떠나가고, 은사가 나타나고, 치유와 예언이 나타나고, 방언이 터지는 것이다. 온몸의 세포가 다 살아나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늘을 향해 외치는 것이다.
예배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처럼 흥분되는 것이다. 예배드리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더 이상 말을 못하고 기절해야 하는 것이다. 기적과 치유가 있는 예배! 귀신이 떠나가는 예배! 그런 예배가 우리들 가운데 회복되어야 한다.
예배에서 흘러넘치는 것이 사역이다
살아 있는 예배에서 흘러넘치는 것이 바로 역동적인 사역이다. 예배가 살고 사역이 이루어지면 거기서부터 양육이 일어난다. 특히 평신도 양육이 살아난다. 그곳에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나타난다.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나타나면 진정한 공동체가 이루어진다.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병 고침의 은사, 방언의 은사, 통역의 은사 등 놀라운 은사들이 모두 나타나기 시작한다.
세상은 인간의 힘으로 살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힘으로 산다. 노래 하나를 불러도 그냥 부르는 것과 성령님의 능력으로 부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말 잘하는 것과 설교 잘하는 것은 다르다. 교회는 은사 공동체이다. 교회는 이러한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의 목적은 선교다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으로 양육이 시작되고 설교가 살아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마음속에 열정이 뜨겁게 불타오른다. 한 영혼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갖게 된다. 이것이 전도다. 전도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전도는 성령님의 능력이다. 전도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고,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는 것이다.
전도는 하나님의 마음이고, 선교는 하나님의 꿈이다. 하나님의 꿈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것이다. 성경은 두 단어로 되어 있다. 하나는 ‘오라(Come)’이고, 또 하나는 땅끝까지 ‘가라(Go)’이다. 교회가 부흥하는 비결은 선교사를 보내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선교사를 보내야 한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난다. 희생하면 일이 일어난다. 헌신하면 일이 일어난다. 죽기로 작심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 죽기로 작정하면 교회는 부흥한다. 부흥을 막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하나님이 지나가실 때 우리는 비켜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끌고 갈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끌고 가실 뿐이다.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은 팀워크를 만든다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나타나면 하나 되어 팀 사역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비전이 생긴다. 비전은 진짜 리더십을 낳는다. 교회는 벌집이나 개미집과 같아서 매트릭스를 해야 한다. 네트워크를 짜야 한다. 넝쿨처럼 뻗어 가야만 한다. 교회는 재생산하는 공간이다. 끝없이 자라 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연합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어 살아 있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영원하다
교회는 사라지지 않는다. 교회는 불멸한다. 세상에는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교회도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교회는 영원한가?’그렇다. 교회는 영원하다. 세상은 변해도 교회는 멸망하지 않는다. 구원이 변치 않는 것처럼 교회는 영원하다. 이 사실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현대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세상은 너무나 다르게 변해 있다. 거대한 죄악의 물결, 세상의 물결, 이 변화하는 물결 속에서 한 개인은 때로는 너무나 의미 없고 무참한 존재로 느껴진다. 이러한 디지털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정신 차리고 살지 않으면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면 우리의 존재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교회다. 교회가 살면 세상이 살고, 교회가 살면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집중해야 한다.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꾸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내가 23년 동안 변함없이, 끊임없이 생각한 주제이다. 예수님이 의도하시고 사도행전에서 보여 주신 바로 그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오늘날, 교회가 많아도 세상은 안 변한다. 신학교가 많고 목사가 많아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현실 앞에 우리가 직면해 있다. ‘우리가 섬기고 있는 것이 정말 교회일까?
우리들이 보고 있는 교회가 주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교회일까?’ 다르게 말하면, ‘교회가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그러한 고민 속에서 나는 교단, 교파, 목사라는 껍질을 다 벗기 시작했다. ‘주님이 의도하시고 사도행전에서 보여 주셨던 진짜 그 교회의 생명력은 무엇인가?
교회를 교회 되게 했던 그것이 무엇인가?’
이 생각을 23년 동안 해 온 게 온누리교회다. 바로 그 교회! 예수님이 의도하시고 사도행전에서 보여 주셨던 바로 그 교회! 사도행전적 교회! 이것이 바로 나의 비전이고, 온누리교회의 비전이다.
2천/1만 비전
이 비전을 가지고 온누리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나는 선교사 2천 명을 보내고 사역자 1만 명을 보내는 비전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2천/1만’ 비전이다. 2010년까지 2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1만 명의 사역자를 세우는 것이다. 이 비전을 선포했더니, 장로님 한 분이 나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목사님, 정말 그 비전, 하나님이 주신 겁니까?”
불가능해 보인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후에 그 장로님은 선교사를 보내는 사역을 맡게 되었다.
하루는 어느 부목사님이 새벽기도에서 고백하기를, 자기는 이 비전이 선교사를 2천만 명을 보내자는 건 줄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 목사님한테 말했다.
“당신이 담임목사다.”
꿈이 큰 사람이 담임목사다. 그렇다. 실현 가능한 게 무슨 꿈이겠는가? 너도 할 수 있고 나도 할 수 있는 것, 생각하고 노력해서 할 수 있는 게 무슨 꿈이겠는가?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시키시면 꼭 해야 하는 것이 꿈이다. 그것에 내 인생을, 내 삶을 투자해 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는 ‘2천/1만’ 비전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 지난 2007년 부활절에 우리 교회는 1천 번째 선교사님을 파송했다.
Acts29
비전이 중요하다. 개꿈 말고, 망상 말고, 허황된 야망 말고 정말 예수님을 위한 꿈, 예수님이 주신 꿈 말이다. 그 꿈 때문에 잠을 못 자고, 그 꿈 때문에 흥분되는 것 말이다.
십 년을 생각하는 사람과 백 년을 생각하는 사람은 말도 다르고 걸음걸이도 다르다. 잠을 못 이룰 만큼, 밥을 못 먹을 만큼, 죽어도 해야 하는 그런 환상, 그런 꿈, 그런 정열, 바로 그것이 비전이다. 어떠한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롬 8:35), 비전은 막을 수 없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비전만큼 간다. 하나님이 주신 꿈만큼 간다. 2000년 전 오순절에 120명에게 성령과 바람과 불이 임했을 때, 그들은 방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처럼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사람은 고생도 무섭지 않다. 고통도 무섭지 않다. 병도 무섭지 않다. 돈 없는 것도 무섭지 않다.
비전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비전이 없는 사람은 동물과 같다. 동물은 꿈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예수님을 전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있다.
예수님의 비전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결혼할 틈이 없었다. 예수님은 학교 다닐 틈도 없었다. 예수님은 삼 년 동안 피곤에 지치도록 일하시며, 누구든지 다 만나 주셨다.
예수님의 꿈은 십자가에서 죽는 거였다. “나는 고통 없이 죽고 싶다.”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고통스럽게 죽으면 어떤가? 꼭 곱게 죽어야만 하는가? 곱게 죽으면 다행이고, 곱게 안 죽어도 상관없다. 예수님만 기뻐하실 수 있다면, 하나님만 기뻐하실 수 있다면!
그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 28:19)고 말씀하셨다. 이 명령을 따라서 우리 교회의 비전은 사도행전 29장을 계속 써 나가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행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Acts29! 이것이 온누리교회의 존재 목적이며, 포기할 수 없는 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