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은혜로 만족하지 말고
날마다 새 은혜를 갈망하라!
[이 책은] 오늘의 은혜로 만족하지 말고 날마다 새 은혜를 갈망하라!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발맞추어 열심히 일하라!
『빛과 소금』에서 연재되며 많은 독자들의 사을 받았던 “내 영혼이 잘 됨 같이”의 정금 같은 글을 만난다!
하나님은 사모하고 갈망하는 자를 찾으신다. 왜 생명의 말씀에 젖어있지 않고 허탄한 말에 젖어 사는가? 좋으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멸시하지 말라. 내 영혼의 갈망에 귀 기울이고 깊이 있는 영성으로 나아가라. 빌 하이벨스, 마틴 로이드 존스, 리 스트로벨 등의 영성 깊은 작가들의 책에서 발췌한 글들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타깃] -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기 원하는 그리스도인 -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영적 성숙을 하기 원하는 그리스도인 - 그리스도인으로의 삶을 바로 알고 하나님께 더 나아가도록 도와준다. - 날마다 새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 영적 스승들의 깊이 있는 영적 묵상을 통해 더 깊이 있는 영성 생활로 들어가게 한다.
[책을 펴내며] 이것을 읽고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006년 9월부터 2년 넘게 『빛과 소금』의 부록으로 “내 영혼이 잘됨같이” 소책자가 『빛과 소금』 정기구독자들을 위해 발간되었습니다. 처음에 이 글들은 오직 『빛과 소금』 정기구독자들이 ‘이것을 읽고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편집하여 소책자로 만들었지만, 이 작은 책자를 읽었던 많은 독자들로부터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았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어떤 독자는 이 소책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봉투를 열고 꺼내 단숨에 다 읽게 되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어떤 새신자는 이 책이 비매품이어서 직접 책자를 수십 권씩 만들어 전도용으로 사용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어떤 성도님은 이 소책자의 제목만 봐도 너무 큰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군부대의 군종, 농어촌 목사님들로부터 매주일 설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26권의 “내 영혼이 잘됨같이” 소책자 중에서 주옥같은 편집부의 글들과 엄선된 유명 저자들의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매달 『빛과 소금』 편집부의 글에서 반복하여 이러한 글들을 드린 것은, 매달 드리는 이 말씀들이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는 말씀이며 행할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의 독자 여러분들도 이 말씀들을 잘 듣고 행할 때, 이 시대에 악한 영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대는 오직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지 아니하면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습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머물러 계셔야만 합니다. 작은 글들이지만 이것들을 지켜 행한다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도 이러한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2009년 가을 두란노서원 출판본부장 노현숙
[책 속으로] 하나님은 작은 일까지도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 인류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자기 뜻대로 가려 하기 때문에 점점 세상이 악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그분의 뜻에 따라 그분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조건을 걸지 말라. 조건을 핑계로 상대방을 이용하거나 허탄한 말로 미혹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이라면 조건 없이 베풀고 배려해야 한다. 무슨 일이든 순수하게, 신앙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마음 아파하신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일에 정신을 팔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가 없다. 우리는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모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일을 도우신다. 기독교의 핵심은, 주의 보혈로 나의 허다한 죄가 씻김 받음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 없이는 죄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고, 이 죄를 씻어 달라고 기도하는 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다 사랑하신다. 그래서 누구나 믿고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다. 그분의 피로 우리의 죄가 단번에 씻음 받도록 하신 것이다. 그 피가 지금도 우리의 죄를 씻기신다. 보혈이 없으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돈은 우상이다. 사람들은 돈을 모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막강한 돈도 결국은 헛되다. 욕심과 죄악으로 모은 돈은 결국 사라지기 때문이다. 돈에는 생명이 없다. 영원한 생명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세상에는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무심코 던진 말이 상대방 마음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곤 한다. 때로는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기까지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의 마음으로 말해야 한다. 한마디 말로 누군가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음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내가 상대편에게 말할 때에 어떻게 말이 나가는지 한번쯤은 생각해 보고 말하라. 우리는 때때로 상대편에게 말을 함부로 던질 때가 많다. 잘못하면 내 입으로 남의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악한 말을 하게 되는가? 그것은 그의 심령이 악함으로 가득 차 있어 악한 말이 나오는 것이다. 천국에 가고 싶다면, 주님을 찾고 갈망하라.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따르라. 그러면 우리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오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게 된다. 결국 순종하는 자에게 천국문이 열린다.
[본문 중에서] 악으로 끌어 모은 돈은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의 보따리를 받아야 한다. 은혜의 보따리를 열어 보면 영원한 생명, 말씀, 소망, 지혜, 명철, 신령한 것과 또한 ‘황금’이 들어 있다. 이 보따리를 받은 사람은 얼마나 축복인가? 돈 보따리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주워 모은다는 것은 세상에서 아무것이나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모두 보따리 속에 넣는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은 항상 이 세상의 헛된 것을 바라보면서 헛된 돈 보따리를 힘쓰고 애써서 구하고 다닌다.
위를 바라보고 은혜의 보따리 찾기를 원하라 사람들은 돈에 대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구렁텅이가 숨겨져 있는지도 모르고 돈 보따리를 모으기 위해서 들어간다. 우리가 세상에서 돈 보따리를 따라가다 보면 생명이 상하게 되고 결국 귀중한 것을 잃게 되는 것을 많이 본다. 세상의 돈 보따리에는 험악한 죄악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돈 보따리를 모으려고 할 때 세상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대부분 음모와 죄악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중에 가서 실망하고 절망하며 상처 받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헛된 것을 좇지 말고 너무 귀한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찾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헛된 보따리를 찾다 보면 어느새 우리의 모습은 천해진다. 이렇게 세상에서 피곤하게 시달리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그러므로 이 험악한 세상에서 가엾게 살지 말라. 돈 보따리보다는 은혜의 보따리 찾기를 갈망하라. 하나님의 은혜의 보따리를 찾아가다 보면 그 보따리에는 보화, 물질, 행복이 가득 담겨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실 것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영혼이 더 해맑아지고, 깨끗한 영혼으로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기를 소원하라.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류를 축복하시고 누구 하나라도 낙오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한 생명도 주님은 버리지 아니하고 품으시고, 그들에게 큰 은혜의 단비와 축복의 보따리를 쏟아 부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신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행복을 찾기를 간절히 바라라.
랜디 알콘의 “하늘 창고를 열어라” 마틴 루터는 “누구든 마음과 머리의 회심만 아니라 지갑의 회심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돈은 인간의 참 성품을 보여 주는 정확한 지표다. 인간의 성품 개발과 돈 관리 방식은 성경에서 시종일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돈을 움켜쥘 때보다 베풀 때 임하는 복이 항상 더 크다. 돈 관리는 영적 생활의 지표다. 예수님은 모든 제자에게 마지막 한 푼까지 버리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분은 다른 신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과정 없이는 아무도 참 하나님께 보좌를 내어 드릴 수 없다는 것도 아신다. 그리스도가 우리 돈과 소유의 주인이 아니라면 그분은 우리 주인이 아니다. 돈과 소유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 우리의 참 영적 상태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는 영구불변의 원리다. 이 연관성의 예를 초대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대 교인들의 깊은 변화는 서로의 필요를 채우고자 자기 돈과 소유를 자진해서 바치는 태도로 극명히 드러났다. 그들이라고 평생 모은 재산을 기꺼이 처분해서 남에게 나눠 주는 일이 쉬웠겠는가? 1세기나 21세기나 회심과 성령 충만은 초자연적 반응을 낳는 초자연적 경험이다. 초대 교회 시절에도 엄연히 사유재산 제도가 있었지만, 그 재산을 기쁘게 베풀고 나누는 것은 초자연적 삶의 새로운 규범이 되었다. 초대 교인들, 가난한 과부, 어리석은 부자, 삭개오, 부자 청년 등 많은 성경 인물을 보면 돈 관리가 곧 참 성품을 평가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임을 알 수 있다. 돈 관리는 영적 생활의 지표다. 돈과 소유에 대한 청지기 생활이 곧 나의 인생 이야기가 된다.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이 그러할진대 역사상 유례없는 풍요의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이것이 특히 더 적용되지 않을까? 결국 우리는 모두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보고하게 되어 있다(롬 14:12, 고후 5:10). 따라서 언젠가 모든 인간은 이 질문에 답해야만 한다. “그 돈이 다 어디로 갔는가? 나는 그 돈을 어디에 썼는가? 후원한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내가 그 모든 부를 사용함으로 영원히 이루어진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돈의 지출을 포함한 모든 이생의 자기 삶에 책임이 있다. 가진 것을 후히 베풀고 신실하게 섬긴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상급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안락에 급급하여 돈을 축재하며 자기만을 위해 산다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상급을 잃을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 그러나 이생의 삶은 영원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믿음이지만 우리의 영원한 상급을 결정짓는 것은 행위다. 이것이 상급의 법칙이다. 마가는 가난한 과부 이야기에 이렇게 썼다.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막 12:41). 잘 보라. 여인의 행동이 “어쩌다 예수의 눈에 띄었다”고 되어 있지 않다. 아니, 예수님은 사람들이 무엇을 내는지 유심히 살피셨다. 예수님과 연보 궤는 얼마나 가까웠을까? 어떤 사람들이 거액을 넣는 것이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쭈글쭈글한 늙은 손에 들린 작은 동전 두 개가 동화(銅貨, 구리동전)임을 알아보실 정도로 가까웠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실물 교육으로 삼으실 만큼 사람들의 헌금에 관심을 두셨다. 내 돈으로 무엇을 하든 내 일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는 이 말씀을 보고 불편한 마음이 들어야 한다. 괴로울 만큼 분명히, 하나님은 그것을 그분 일로 보신다. 하나님은 그분이 맡겨 주신 돈을 우리가 어떻게 쓰는지 굳이 양해를 구하시지 않고 깊은 관심으로 지켜보신다.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보이지 않는 영역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순간 그분이 자기 백성들을 일부 모아 놓고 나의 재정 관리를 실물 교육으로 사용해서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지만 고등학교 시절 크리스천이 되던 날부터, 헌금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내 삶의 필수 부분이었다. 내 삶 최대의 기쁨 중 많은 부분과 주님과 가장 친밀한 시간의 일부는 헌금 생활을 통해서 왔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을 만나고, 하나님이 나누도록 인도하실 때면 나는 갑자기 활력과 의욕과 기쁨에 취한다. 예수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하셨다. 왜 그럴까? 우리가 줄 때 한쪽만 아니라 셋 다(하나님, 받는 사람, 나)에게 복이 되기 때문이리라. 하나님께 돈을 받는 것은 첫째 축복이다. 우리는 거기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내가 주어 다른 사람들이 받는 것은 둘째 축복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셋째 축복이다. 둘째 축복과 셋째 축복이 있기에 첫째 축복은 과소유의 저주가 되지 않고, 우리 삶은 돈과 물질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 아이러니지만 돈을 움켜쥘 때보다 베풀 때 임하는 복이 항상 더 크다. 이것도 하나님의 상급 법칙의 일부다. 주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복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려는 자신의 상급마저 팽개치는 것이다. 줄 수 있었는데도 주지 않아 우리가 잃은 복이 얼마나 될까? 하나님의 상급 법칙대로 살지 않아 놓친 영적 성장과 기쁨이 얼마나 될까? 나는 바울이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고 말한 이유를 배웠다. 즐겨 내는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매번 드릴 때마다 그분을 더 깊이 사랑함을 깨달았다. 내 경우 누군가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기쁨에 버금가는 몇 안 되는 경험 중 하나는 내 돈과 소유로 영원에 영향을 미치는 지혜롭고 후한 선택을 내리는 기쁨이다. 이는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최고의 예배 행위다. 그리고 우리가 지음 받은 목표다. 우리의 영원에 예비된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돈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돈을 돈으로만 보고 영원에 미칠 잠재적 영향력에 비추어 보지 않으면 우리는 근시안적 시각에 머물게 되고, 그 결과 근시안적 재정 결정과 생활 방식을 피할 수 없다. <돈 보따리를 주워 모으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내가 상대편에게 말할 때에 어떻게 말이 나가는지 한번쯤은 생각해 보고 말하라. 우리는 때때로 상대편에게 말을 함부로 던질 때가 많다. 잘못하면 내 입으로 남의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악한 말을 하게 되는가? 그것은 그의 심령이 악함으로 가득 차 있어 악한 말이 나오는 것이다.
언어를 경영하라 우리는 내가 한 말을 상대편이 어떻게 들을지 한번쯤은 생각해 보고 주님의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말만을 중요시하는 이 시대에 내가 한 말이 어떻게 들릴 수 있는지, 상대편이 내 말을 어떻게 판단했는지 늘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입으로는 기름이 잘잘 흐르는 말을 하며 겉으로는 꿀 같은 단어를 나열하지만, 그 마음속에는 독을 품고 있다. 시편 기자는 그런 사람을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고 표현했다. 잠언 26장 25절에도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니라”는 말씀이 있다. 즉, 어떤 사람의 말은 좋으나 그 마음에는 일곱 가지의 흉계가 있으므로 그를 믿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중성격을 갖지 마라. 마음에는 독을 품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지 마라. 어떤 사람들은 생각해 보지 않고 자기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막 말한다. 그러다 보면 상대방은 상처를 받아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지고 그의 영혼은 병들어 쓰러지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존귀한 자라면 누구나 내가 한 말이 그 사람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생각하고 주님의 눈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하고 따르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열심히 주를 섬기고 봉사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어떤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착각 속에 빠져서 이방인 같은 말로 쏴 대다가 나중에 잘못했다고 깨닫곤 한다. 그러나 그 말로 상대방의 영혼은 쓰러져 마치 폭탄 세례를 맞은 자처럼 망가져 절뚝거린다. 그 상처 받은 사람은 집에 가서 그 사람을 저주하며 미워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먼저 한번쯤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하나의 조건이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한번쯤은 항상 생각해 보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아닌가!
‘마음’과 ‘말’이 똑같은 사람이 되어라 사람은 그가 생각했던 마음이 입으로 쏟아져 나온다. 누구든 자기 생각을 숨길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 마음이 정결한 가운데 살아야 한다. 그 마음에 욕심, 미움, 저주가 없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편에게 품었던 나쁜 말들을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내뱉게 된다. 마음에 품은 그 죄악을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 악한 것이 내 마음에 태산같이 쌓여서 어느 순간 입으로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에 품고 있는 죄악을 회개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악함이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상대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을 오해하고, 그들을 억울하게 하고, 그들에게 상처 입히고, 본이 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로서 그 삶을 날마다 살아가도록 나 자신을 지켜 나가야 한다. 한번 생각하고 상대편에게 좋은 말들,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이 되는 말들을 많이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마음은 악독하고 간사한데 입으로는 매끄러운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지 마라. 내 마음과 말이 똑같은 사람이 되어라. 그런 사람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다.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듯이 혀는 우리 인생의 바퀴를 불사르고 온몸을 더럽힌다. 작은 혀는 모든 사람의 영혼을 망가뜨릴 수 있다. 잠언 18장 21절에서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했다. 그러나 작은 혀로 남을 기쁘게 할 수 있고, 또 생명을 살릴 수 있다. 입을 조심하고 상대방에게 좋은 말을 많이 하라. 가장 귀한 것이 ‘말’이다. 스스로 겸비하고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나쁜 말을 자녀에게 되풀이하지 마라. 악한 말이 그대로 자녀에게 이루어진다. 악한 말은 무의식중에라도 하지 마라. 악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좋은 말만 하라. 잠언 16장 24절에서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고 했다. 즉, 선한 말은 몸에 양약이 되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혀와 입이 깨끗해야 하며, 항상 정결한 가운데 아버지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어떻게 더러운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가? 우리가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때 그 상처 받은 영혼이 악한 마음을 품고 저주하는 마음을 품다가 세상을 떠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과연 어떠하겠는가? 그때를 생각해 보라. 나 때문에 상처 받은 사람이 지옥에 간다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의 언어생활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말하라> 중에서
|